Leaving Las Vegas

from text 2007/10/12 01:53
술자리 내내, 모처럼 밤길을 걸어 집에 오는 내내,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떠나지 않았다. 무리 속에서 혼자 벤을 생각하며, 벤과 대화하며 술을 먹었다. 그를 생각하면 더 큰 잔에 술을 붓고, 더 자주 잔을 들어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잘 들리지 않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에 바빴다.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羑里에서처럼 빤히 내다뵈는 걸 받아들이는 육조의 심정이었을까, 이제 그렇게 다 버리고만 싶었던 것일까, 종내 갈 수밖에 없는 시간의 가르침을 그저 따라간 것 뿐일까, 얼마 전 술 마실 적 심정으로 미루어 대꾸할 뿐, 더 오래 잔을 나누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게 한 생애에 주어진 사랑과 '행복'은 유한할 터, 이제 어디로 간단 말인가.

I'm Ben. I'm Sera. Sarah, with an 'H'? With an 'E', S-E-R-A, Sera.

from text 2007/10/10 10:11
저명인사 가운데, 대부분의 글들을 꼬박꼬박 읽는 개인 홈페이지 내지는 블로그가 있다. 김규항, 강유원, 우석훈이 그들이다(강유원의 글들에서는 조금 멀어졌다). 김규항과 강유원의 책은 웹에서 대부분 읽은 내용인 줄 알면서도 몇 권 샀고, 우석훈의 책은 몇 번이나 살까말까 망설이면서도 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살떨리는 강의록과 댓글들을 보고나니 몇 권 주문하지 않을 수 없겠다.

어제, 최성각의 달려라 냇물아, 백가흠의 조대리의 트렁크를 주문하였고, 안 그래도 보고 싶던 정민의 책 읽는 소리,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선물 받았다(책 선물을 받아본 게 언제였던가). 요즘 다시 책 읽는 재미에 슬금슬금 빠져들고 있다. 역시 오래 전 사다놓은 서준식의 옥중서한을 읽고 있는 중인데,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보다는 한참 윗길이다.

* 우선 골고루 골라 주문하였다. 88만원 세대, 도마 위에 오른 밥상,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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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레미

from text 2007/10/08 23:56
바람을 느낄 때면 코끝이 영 간질간질한 게 가을 내음이 한창이다. 오후 네 시, 손님 만날 일이 있어 아리아나 호텔에 갔다가 오 분도 안 되어 일을 끝내고는 서연이 마칠 시간이 남아 조금 걸었다. 호텔 뒤편으로 골목을 이리저리 밟히는 대로 걷다보니 들안길 네거리였다. 이 시간에 걷는 길이 주는 낯설고 오래된 느낌을 잠시 즐길 수 있었다.

피아노학원에는 그래도 약간 일찍 도착하여서 이 녀석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잠깐 볼 수 있었다. 며칠째 '도레미'만 배우고 있는 모양이다. 녀석이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있는 모습을 본다는 게 이리 물기 차오르는 일인지 몰랐다. 그러나 평화롭고 착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잠시, 데리러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여기 가르치는 분들은 어린이집 교사들과 달라서 애들 대하는 모습이 거칠고 어설퍼 보여 마음이 언짢았다.

오늘처럼 한 주에 한 번 0124님이 야근을 하는 월요일은 하루가 길다. 피아노학원엘 다니고부터는 이 녀석을 데리고 오자마자 부엌으로 가 마른 그릇들을 수납하고, 가져 온 식판과 수저, 아침에 밀린 밥솥과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쌀을 씻어 밥을 짓는데, 이 날은 여기에다 밥과 후식을 챙겨 먹이고 같이 노는 것까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잠시 자취를 할 때나 가끔 설거지를 할 때마다 느끼던 대로 더러운 찌꺼기를 씻어내고 헹군 그릇들을 가지런히 정돈할 때면 마음도 덩달아 깨끗해진다. 묵은 찌끼가 쓸려가면서 자꾸만 멈추려는 육체를 자극한다. 오늘은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일 못하는 놈이 표낸다고 아침에 스탬프 잉크를 쏟아 손이 엉망이 되었는데, 비누로 아무리 씻어도 씻겨지지 않던 것이 설거지를 마치고 났더니 손톱 밑을 빼곤 깨끗해졌다.

나이가 든 걸까. 갈수록 아깝고 안타까운 일들이 많아진다(조심하고 주저하는 일이 많아졌다). 앞을 내다보아도, 뒤를 돌아보아도. 전하지 못한 소식과 부치지 못하는 편지가 무겁다. 한때 가슴에 새겼던 말, 김남조의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이 문득문득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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