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잠

from text 2007/08/16 16:31
장마대신 우기(雨期)라는 용어를 쓰자는 말을 들으니 밀림, 원숭이, 바나나, 세렝게티 초원 뭐 이런 게 두서없이 떠오르면서 눅눅하고 더운 기운을 지울 수가 없다. 오늘 낮 업무 보러 잠시 나갔다 왔는데 참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가본 적 없는 사막을 걷는 기분이었다. 어디 가서 여름잠이라도 실컷 자고 왔으면 딱 좋겠다 생각했다. 이게 다 이것대로 즐기면 좋을 텐데 아직 수양이 많이 부족한가 보다. 강명관의 조선의 뒷골목 풍경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그중에서 한 대목을 재인용해 본다. 이춘풍이 아내에게 이르는 말로 원 출처는 古典國文小說選.

자네 내 말 들어보소. 사환 대실이는 술 한 잔을 못 먹어도 돈 한푼을 못 모으고, 이각동이는 오십이 다 되도록 주색을 몰랐어도 남의 집 사환을 못 면하고, 탑골 북동이는 투전 골패 몰랐어도 수천 금을 다 없애고 굶어 죽었으니, 일로 볼작시면 주색잡기 하다가도 못사는 이 별로 없네. 자네 차차 내 말 잠깐 들어보소. 술 잘 먹는 이태백도 노자작(鸕鶿酌) 앵무배(鸚鵡杯)로 백년 삼만 육천일 일일수경삼백배(一日須傾三百杯)에 매일 장취하였어도 한림학사(翰林學士) 다 지내고, 자골전 일손이는 주색잡기하였어도 나중에 잘 되어서 일품 벼슬하였으니, 일로 볼지라도 주색잡기 좋아하기 남아의 상사(常事)로다. 나도 이리 노닐다가 일품 벼슬하고 이름을 후세에 전하리라.

화려한 휴가

from text 2007/08/07 17:13
어제 짧은 휴가를 즐기기 위해 아카데미극장에서 화려한 휴가와 다이하드를 보았다. 그리고 저녁에는 형석이랑 진탕 마셨다. 녀석 덕에 아주 마음에 드는 바를 하나 알았다. 화려한 휴가는 머꼬의 평도 있고 해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자료 사진들을 곁들여 좀 더 다큐멘터리적으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그리고 따로 노는 안성기와 그 배역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도 있었지만 썩 괜찮았다.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아마 가장 많이 울컥하며 본 영화일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일어설 수 없었다.

언젠가 어느 구석에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 뭐 이런 걸 적어넣은 기억이 난다. 율리시즈의 시선, 파업전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대부, 동사서독, 박하사탕 등등을 적은 것 같다. 단 한 편만 골라야 한다면 단연 테오 앙겔로플로스의 율리시즈의 시선을 꼽겠다(율리시즈의 시선에 대해 이 블로그에 써둔 글이 분명 있는 것 같은데 못 찾겠다. 태그가 붙어있는 걸 보니 어둠 속의 댄서 이야기하면서 썼던 것 같은데 글꼴 가지고 이리저리 만지다 날아간 모양이다). 예전 무지개극장에서 마지막 프로를 대여섯명의 관객이 함께 봤다. 파리 텍사스와 베를린 천사의 시를 만든 빔 벤더스 감독은 이십세기에 영화가 있었다면 아마도 이 영화일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안개 속의 풍경과 그 아름다운 비올라 선율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선율을 떠올릴 때면 산타페스토리 앞에 붙은 작은 쿠키집 이츠야미에서 쿠키 구워 팔던 때가 항상 같이 떠오른다. 그때 만나던 그 사람들도. 잔뜩 흐린 날이면 그 선율을 타고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또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다.

*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 하나 추가해둔다. 그게 다가 아니다.

단체사진

from photo/D50 2007/08/06 09:21
어제 모처럼 처가 식구들이랑 다사까지 밥 한 끼 먹으러 갔다. 오리 고기 맛이야 별로 입에 맞지 않았지만 주인 아저씨 마음씨가 좋았다. 나오는 길에 호박 한 덩이를 거저 주시더니 밭으로 가 깻잎을 마음껏 따가게 해주셨다. 0124님 덕에 서연이 어린이집 참여수업 이후 처음 오공이를 만져보았다.

토요일부터 어제, 오늘, 내일까지 휴가다. 지난 한주 서연이 방학도 끝나고 월요일 오전 조용한 집에서 혼자 블로글 들여다보고 있자니 비로소 평화가 흐른다. 어제처럼 설치고 나대는 서연이를 본 적이 없다. 망할 놈의 파워레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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