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친구

from text 2007/07/21 13:48
술친구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거의 유일하게 여자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인데, 대학 동기생이지만 나보다 한 살이 많던가 그랬다. 이 친구는 서점에서 그냥 책을 들고 나오는 방면엔 선수였다. 그렇게 들고 나온 책을 몇 권 받기도 했다. 주로 동성로 뒷골목 지하 깡통 맥주집에서 쥐포를 뜯으며 술을 마셨는데, 그 미군부대에서 빼돌린 게 분명한 깡통 쌓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마시다 보면 내가 먼저 쓰러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친구는 인간의 소통불가능성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하였고 나는 잘 동의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여간 그 친구 덕에 박인홍의 '벽 앞의 어둠'과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알았고, 빌린 그 책은 그 친구가 결혼할 때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라며 돌려주지 않았다. 아주 특이한 글씨체를 가진 친구였다. 일이학년 때 종종 어울리다가 어설픈 '사랑과 혁명'에 빠져 오래 보지 못하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친구가 결혼하기까지 한동안 만났다. 언젠가 길을 걷다 우연히 아기를 안고 가는 걸 보고 잠시 얘기 나눈 게 마지막이다. 그게 벌써 한 십여 년 되었다.

그리고 정호와 준탱이를 빼놓을 수 없다. 서너 살씩 적은 후배들이지만 참 많은 정을 쌓았다. 이들은 지금 너무 멀리 있다. 하나는 부천에서 바쁘게 살고 있고 하나는 (지금은 잠시 들어와 있지만) 대양을 떠돌고 있다. 떨어져 있고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 함께 살고 있는 친구들이다. 언제나 그랬듯 다시 계전 앞 돌계단에서 함께 쓰러져 자고 싶다. 다리뼈 하나씩만 남기고 뼈째 통닭을 다 뜯어먹고 싶다. 시도 때도 없이 이런저런 핑계로 술잔을 나누고 싶다. 사람과 세상을 향한 숨은 열정을 확인하고 싶다.

나이가 들고 오랜 시간 술친구는 마달이었다. 그리고 후에 형석이가 합류하였다. 0124님처럼 지금도 만나는 술친구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닮은 구석이 없어 나랑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인연은 그랬다. 차곡차곡 술자리와 술병들을 쌓다보면 저릿하게 느껴오는 동질감이 있다. 섣부르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속내를 나눌 수 있는 친구란 많지 않은 법이다. 다 다르고 하나만 비슷하여도 되는 그 하나를 가진 놈들이 많지 않은 까닭이다.

어제, 동해 바다를 잠시 보고 왔다. 간간이 비가 뿌리는 가운데 바람에 일렁이는 바다에는 갈매기 몇 마리만 바빴다. 깊이 숨겨놓은 풍광인 듯 일행 몰래 나만 본 듯한 느낌을 간직하고 왔더랬는데, 돌아오고 나서도 좋은 술친구를 하나 더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에 그 바다, 그 갈매기처럼 계속 마음이 울렁이고 바빴더랬다.

* 아, 다 쓰고 보니 하맹이 빠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 후까지 줄기차게 같이 마셔댄 친구이자 진정한 박카스의 세계로 접어든 친구인데, 친구들끼리 몰래 간 이차, 삼차 자리를 귀신같이 찾아온다던지 파계를 앞둔 비구니 스님이랑 같이 술을 마신 이야기, 암자에 공부하러 가서는 처음에 술을 말리며 이 친구의 등을 두드려주던 스님이 나중에는 이 친구에게 등을 내밀고 말았다는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전해온다. 내가 한번씩 잠시 동안 술을 끊겠다면 준탱이는 제가 좋아서 찾고 위로받을 때는 언제고 몸 좀 그렇다고 멀리 해서야 되겠냐며 일침을 놓곤 했지만, 정작 이 친구 앞에서 제가 술을 좀 사리다가는 '슬픈 생각을 해 보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들어야 했다. 그가 지나가는 길에는 외상이 깔렸고 낡고 찌그러진 그 집들에서는 항상 그 친구가 들고 간 심수봉 언니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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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6 열네 번째 롤

from photo/M6 2007/07/18 03:30
초복에 서연이 외가에 들렀다가 성북교에서부터 신천을 따라 칠성시장까지 걸었다. 집까지 걸어오고 싶었지만 이 녀석 해찰이 심해 다리 두어개 지나는데 서너 시간은 족히 걸렸다. 칠성시장에 온 김에 옛날 족발을 좀 사왔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순식간에 맥주 한 캔이랑 '처음처럼' 하나를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 오늘(제헌절) 덜 찍은 필름을 소진하며 올리브칼라에 필름 맡기러 가는 길에 몇 컷.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summicron 50mm 3rd, 코닥 프로이미지100

M6 열세 번째 롤

from photo/M6 2007/07/18 03:10
지난 토요일, 모처럼 서연이를 데리고 이십대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대명동 계대를 찾았다. 그전에도 한 번 들렀을 때 느꼈지만 새로 한 조경은 여전히 낯설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는데도 마치 어른이 되고 처음 어릴 적 초등학교를 찾은 것 마냥 모든 게 작고 사랑스럽게 느껴져 무척 기이한 기분이었다. 학생회관 앞 계단과 돌벤치가 이렇게나 작았다니, 기념으로 만들어놓은 조금 큰 모형을 보는 듯 했다.

* Leica M6, summicron 50mm 3rd, 후지 오토오토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