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면을 위하여

from text 2014/09/22 16:12
겨울은 또 어찌 나려고, 가을이 속절없이 깊어간다. 더는 술 먹고 고꾸라지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리라, 까르르 웃는 두 아이와 성실한 아내를 시체처럼 멀리서 바라보며 마음먹는다. 꿈이 무엇이고 인연이 무엇인가. 알량한 것 하나만 품고 멀리도 왔다. 덜어낸다며 채우고 채운다며 덜기도 했겠지. 난 체는 오죽했으랴. 중독된 시간만큼 해독에 시간이 필요할까. 그러고 나면 레고 장난감처럼 산산이 부서뜨려 다시 만들 수 있을까. 아이처럼 기껏 만들어놓은 걸 별일 아니라는 듯 간단히 해체하고 다른 걸 구상할 수 있을까. 지난날이 이리 어렴풋한데 분명한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밤이 깊으면 별은 더 반짝이고 새벽이 가깝다는데, 엊그제 고꾸라지기 전에 올려다본 하늘에서는 별이 제 운명을 노래하고 있었다. 땅에 발이 닿지 않는 나는 터져 나오는 노래를 억누르고 쥐며느리처럼 둥글게 몸을 말았다.

방앗간 전선 위의 참새

from text 2014/08/14 17:14
헐하고 허름한, 공중부양으로 하루를 견딘 우리가 지친 해를 위로하는 저녁, 젓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농담, 흘러간 가락에 비틀거리는 술잔, 무너지는 마음, 오지 않을 사람, 가고 싶은 나라, 보고 싶은 욕망, 중독처럼 피어나는 열꽃, 회한과 미련, 적막,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지처럼, 부서지는 운명처럼, 주인을 닮은 술집.

잘못 살아온 게 아닌가,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며칠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굴곡 없이 편하게 살아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새옹지마 같은 세상, 모쪼록 전화위복이 되기를.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없는 갓끈도 고쳐 매지 않기를. 종일 비가 내린 하루, 방앗간 전선 위로 간다.

천천히

from text 2014/07/30 13:33
어딘가 단절된 곳에서 한 몇 년, 적게 먹고 조금 걷고 그저 숨만 쉬다 왔으면 좋겠다. 비라도 주르륵 내리는 날이면 냉큼 무언지 모르는 것이 그리워 술이라도 찾아 힐끔거리겠지. 더러 소리 내어 울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어름이면 큰아이는 기리를 깨쳐 대성하여 있을까. 다른 길을 찾아 새로운 세상을 연마하고 있을까. 재롱 많은 작은아이는 어떤 사람을 만나 세상을 알아가고 있을까.

지난 주말이었다. 마른장마의 막바지, 구룡포읍 구평리 해변에서 짙은 해무와 차가운 바람을 맞는 호사를 누렸다. 해무가 맺혀 솔가지에서 물방울이 들을 정도였다. 분위기를 주체 못하고 밤새 주도삼매에 들던 중 잠시 들른 화장실에서 족히 십오 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지네에게 오른발 발가락을 물렸다. 일행에게 잡혀 변기통으로 사라진 주황빛 지네는 불로 지지는 듯, 가시로 찌르는 듯 꼬박 두 시간을 그렇게 아프게 하더니 물린 사람을 술 마시기 전의 몸뚱이로 만들어 놓았다. 열네 명이 정오부터 다음날 오후 서너 시까지 내달린 와중에 가장 많이 마시고도 가장 멀쩡할 수 있었던 건 다 그놈 덕분이었으리라. 뒤에 생각하니 그렇게 황천으로 보낼 일은 아니었다. 바닥을 잘 살펴보지 못한 내 잘못이지 제가 먼저 해코지하기야 하였겠는가. 길을 잘못 찾아든 제 탓도 없다 할 순 없겠다만, 늦게나마 명복을 빈다.

새로운 질서가 온다고 한다. 천천히, 나는 나의 질서를 지킬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