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에 해당되는 글 9건

  1. 첫눈 2007/12/30
  2. 겨울, 비 2007/12/28
  3. 남자와 여자 4 2 2007/12/20
  4. M6 열아홉 번째 롤 2007/12/15
  5. 서연이가 찍은 사진 2007/12/15
  6. 남자와 여자 3 2007/12/15
  7. 남자와 여자 2 2007/12/13
  8. 남자와 여자 2007/12/12
  9. 비애와 더불어 사는 삶 2007/12/03

첫눈

from text 2007/12/30 07:18
새로 공부하듯 술을 마시던 도중 만난 눈, 그 눈팔매에 기어코 말을 하고 말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싸래기처럼 왔다던 것 말고는, 호쾌한 첫눈이었다. 거리를 곰처럼 뒹굴던 사람들이 예뻤다.

* 커다란 백지에 이름 석자 써본다. 이을 말이라곤 없어도 그냥 그렇게 한 귀퉁이에 그 이름 불러본다. 거기도 여기처럼 하늘이 던지는 돌에 멍드는 가슴이 있는가. 그 팔매에 패인 시퍼런 가슴 있는가. (서른여섯 시간 후, 이천칠년 마지막 날, 다시 내린 눈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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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비

from text 2007/12/28 21:01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영원한 걸 꿈꾸고 그리워한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사람도 그렇다고 하면 으레 고개를 끄덕일 정도는 된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나침반이나 지도, 또는 길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길에 그만 익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렇게 알 수 없는 말들을 또다시 늘어놓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곤 영원히 없을 거라는, 누가 찍은 건지 알 수 없는 낙인 때문이다. 그 자국이 아직 시뻘겋게 타고 있기 때문이다. 종일 겨울비가 그렇게 내리더니 내어놓은 가슴에 남은 흔적은 지울 생각도 않고 저만치 달아나고 말았다. 자, 누굴 원망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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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4

from text 2007/12/20 23:31
모래 위에 모래로 쌓은 탑 같은 거였어. 예뻤냐고? 술잔을 놓으며 남자가 말했다. 그때 내가 볼 수 있는 건 나를 보는 나밖에 없었어. 여자가 잔을 채웠다. 낮게 깔렸던 꽃잎처럼 잠시, 여자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언제나 짧은 여생, 생업이든 사랑이든. 모든 별들이 나무 틈으로 집중하였으므로 노랗게 치장하던 달은 술잔 아래 숨고 말았다. 여자는 낮게 깔리는 꽃잎을 따라 천천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술잔이 놓였던 자리에 슬몃 물기가 스몄다. 나무 틈으로 비를 머금은 새떼가 가득 날아들었다. 소란한 시간이 왔군. 남자는 오랜 그리움인 양 여자의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모래를 두 숟가락이나 먹었더니 배가 불러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진흙으로만 한 공기를 거뜬히 비웠답니다. 찰진 똥을 누었더랬지요. 새처럼 지저귀며 여자는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그리움을 만졌다. 별의 나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나이보다 적은 걸요. 여자가 꿈결 같은 머리칼을 더듬는 동안 남자는 다음 세상을 보고 있었다. (계속)

M6 열아홉 번째 롤

from photo/M6 2007/12/15 22:19
맑은 가을날 산에 올랐을 때부터 사진이니 오래 되어도 한참 오래 되었다. 한 롤 맡기나 두 롤 맡기나 가격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데, 두 롤 모으려면 봄은 되어야 할 것 같아 나간 김에 맡겼다. 어떤 예쁜 이미지를 찍어보고 싶단 생각을 문득문득 하곤 하는데, 언제 한 장이라도 찍어볼지 모르겠다.

중앙통 거리는 그래도 성탄과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분주한 사람들 가운데 천천히 먼 길을 가는 사람들 생각에 잠시 잠겼다. 찬 바람에 담배 연기가 한참 머물다 흩어지곤 했다.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코닥 포트라160vc

서연이가 찍은 사진

from photo/D50 2007/12/15 22:01
대구우체국엘 갈 일이 있어 나갔다가 이이팔기념중앙공원에서 만나 서연이가 찍은 사진, 그리고 어린 사진사. 남은 필름이나 소진하게 사진기 갖고 나오랬더니 서연이가 자기도 찍을 수 있는 사진기를 갖고 가재서 오공이도 들고 나왔댄다. 잘 몰랐는데, 아무래도 사진 찍을 때 표정을 좀 바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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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3

from text 2007/12/15 12:08
남자와 여자는 소리 없는 찻집에 마주앉았다. 주인도 시중꾼도 없었다. 해바라기 모양을 한 시계만이 움직이는 물체였다. 나를 닮은 딸을 낳아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내가 없더라도 당신을 잘 보살필 거예요. 여자가 말했다. 그 전에 나를 떠나면 당신을 죽여 버릴 거예요. 왼손 검지 손톱을 살짝 들어 바닥을 기는 이를 지그시 누르는 의지보다 간단히, 찍 소리도 없이 가볍게. 그때, 남자는 믿었을까? 이 작은 행성보다 더 작은 체구가 전하는 다짐을. 다른 별들이 돋기 시작했을 때, 함께 나무 틈에 가 숨기 전에 남자가 말했다. 오늘은 꽃잎을 띄운 맑은 술을 한 잔 하고 싶군. (계속)

남자와 여자 2

from text 2007/12/13 15:04
길을 걷다, 남자가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 당신의 주위를 돌고 있는 작은 행성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당분간, 아무도 이 별을 찾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창백한 해바라기들이 남자를 보고 웃고 있었다. 하얗게 바랜 저 달은 당신을 닮았군, 남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해는 지레 길게 이울었지만, 어디에도 그림자는 없었다. 이 별 어디에도 이제 누군가 남겨놓은 흔적은 없어 보였다. 물론,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계속)

남자와 여자

from text 2007/12/12 21:38
가슴이 콩콩여 가슴에 손을 얹었더니 심장, 그 바닥까지 닿았네
가만히 손 위에 올려놓고 보니 나를 응시하는 두 눈동자
물끄럼한 서슬에 희미한 웃음만 흘렸네, 꾸깃꾸깃 제자리에 넣어두었네

남자는, 그랬다. 바깥 구경 한번에 온 세상을 알아버린 듯, 제집에서 날뛰다 두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그럼, 여자는? 희죽, 죽을 쑤어 제 머리를 덮어버린 것이다. 지나가는 개에게나 주라고? 아나, 받아라. (어떤 행성 이야기, 계속)

비애와 더불어 사는 삶

from text 2007/12/03 10:56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비 내린 일요일, 약에 취해 하늘거렸다. 달랠 길 없었다. 오래된 처방은 하룻밤 진통에 그쳤다. 여름 한낮, 낮술 먹고 나온 듯, 나 몰라라 말갛게 씻긴 하늘이 미워 비틀거렸다. 아프지 않기를, 나 말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