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결국 계절은 제자리를 찾았다. 잦은 바람에도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누가 뭐래도 세상은 아랑곳없다. 별 탈도 뒤탈도 없다. 흥미로운 일도 새삼스러울 일도 없다. 그렇게, 건조한 미라의 가슴을 안고 이창동의 시를 보았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추리소설 몇 편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죄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펄펄 끓던 시절, 나에게도 앤톨리니 같은 선생이 있었거나 그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였다. 그뿐이었다). 직장에서는 어쨌든 10년 근속상을 받았고, 이날과 몇몇 핑계거리가 있는 날엔 많은 술을 마셨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다가 그게 무언지 몰라 주춤거렸으며 버릇대로 일찍 취해갔다. 달라진 게 있다면 부끄러움이 많아졌다는 것이고 저녁으로 한두 시간씩 서연이의 바둑을 보는 게 낙이라면 낙이다. 닭 모가지를 베고 자는지 잠도 꿈도 짧아졌고 무기력함과 건망만 늘었다. 젠장, 길이 있는데 길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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