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촉루처럼 2016/02/08
  2. 배웅 2016/01/27
  3. 돌아보면 2016/01/26
  4. 룸펠슈틸츠헨을 위하여 2016/01/10
  5. 결심 2015/12/30
  6. 다른 우주 2 2015/11/25
  7. 소설 2015/11/23
  8. 꽃무릇을 두고 2015/11/09
  9. 똑똑 2015/10/13
  10. 폭음을 삼가고 2015/10/02
  11. 건강하고 꿋꿋하게 2015/09/25
  12. 가을의 바람 2015/09/14
  13. 지난 세기 2015/08/26
  14. 칠석 2015/08/20
  15. 입추 2015/08/08
  16. 절명을 기다리듯 2015/07/09

촉루처럼

from text 2016/02/08 22:32
그럴 때가 있었다. 누군가 날 이해할 날이 올 거라고, 언젠가 나도 세상을 알 수 있을 거라고 믿던 때가. 여전히 죽음은 그에게 우주의 소멸일 뿐이지만, 나에게 그것은 어떤 생성일지 모른다. 우주에게는 다만 큰 슬픔일지도 모르겠다. 젠장, 믿는 걸 바라기보다는 바라는 걸 믿는 쪽이 된 건가.

어쩌다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보면 내가 저기 살고 있구나, 그저 촉루처럼 무너지기도 한다. 소멸 너머 무럭무럭 자라기도 한다. 불완전 연소의 꿈이 완전 연소일 리가 없다. 꿈을 꾸지 않을 도리가 없을 뿐.

배웅

from text 2016/01/27 23:38
출근길, 잠시 걷다가 건너 차선에 정차한 노선버스를 보았다. 드문드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다알리아처럼 흔들리며 창밖을 응시하였고, 시선의 끝에는 어쩐지 더운 바람이 불었다. 차창에 낀 얼룩이 제멋대로 서로를 이었다가 갈랐다. 뭘 남기거나 더하지 마라. 찰나에 겁이었던 세상은 정해진 신호에 다시 움직였다. 하등 관계없어 그럴 테지. 정든 걸음을 멈추고 하릴없이 떠나는 세상을 멀리 배웅하였다. 먼눈으로 오래 지켜보았다.

돌아보면

from text 2016/01/26 16:37
돌아보면 늘 어리고 어리석었다. 간혹 기린을 본 원숭이처럼 두리번거리며 흉내나 냈을 뿐이다. 목을 길게 빼고 눈치나 살폈을 뿐이다. 운이 따라 이만큼이나마 온 게다. 조상의 은덕을 입고 주변에 해악을 끼쳤다. 돌아보면 더 어리고 어리석을 일만 남았으니 우선 관계를 단절하고 말을 삼갈 일이다. 빛났던 만큼 아직 너와 나는 참혹할 따름이다. 금주 삼십삼 일째, 겨울 해가 점처럼 오도카니 들어앉았다. 누가 그 자리 봄을 멀리 밀쳐놓았다.

룸펠슈틸츠헨을 위하여

from text 2016/01/10 21:13
값이 오른 담배를 단 한 갑도 사지 않겠다는, 돈도 돈이지만 이 정부에 이걸로 세금을 더 내지 않겠다는 지지난해 말 결심을 완벽히 이행하고 있다. 끊은 건 아니고 적당히 줄이면서 제주도나 해외를 오가는 지인들에게 면세 담배를 공급받은 것이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모든 식당 금연을 비롯한 금연 정책 전반에 대한 반대를 나름대로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눈치는 빤한가. 올 하반기부터 제주도의 내국인 면세점에서 담배를 취급하지 않는다 하니 그때쯤에는 대폭 줄이거나 아예 끊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주 찾는 황현산의 트위터에서 금연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생각난 것.

올해 두 아이가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진학한다. 0124님은 마흔을 바라보고 나는 곧 쉰을 바라볼 테다. 뚜렷한 답이 없이 갈수록 고민만 많던 첫째의 바둑은 당자의 뜻을 따라 또 일단 가 보기로 한다. 뭘 해도 어리게만 보이는 둘째는 어째 걱정이 앞선다만 타고난 운수를 믿어 보기로 하고. 선택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다 제 몫이 있는 거라면 결국 제자리를 찾을 게다.

금주 십칠 일째, 신기할 정도로 술 생각이 그리 심하지 않다. 다음은 세계의 동화(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100편의 동화와 민담)에 실린 그림 형제의 룸펠슈틸츠헨 마지막 문단. 난쟁이, 룸펠슈틸츠헨이 뭔 죄란 말인가.

난쟁이는 울부짖으면서 분을 이기지 못해 오른발로 땅을 쾅쾅 내리쳤다. 그 통에 난쟁이의 몸뚱어리가 허리까지 땅 속에 박혀버렸다. 그러자 난쟁이는 분통을 터뜨리며 이번엔 두 손으로 왼발을 마구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난쟁이의 몸뚱어리는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결심

from text 2015/12/30 22:56
또 한 해가 간다. 언제이던가. 인위적으로 구분해 놓은 시간에 구애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결심도 늙고 나도 늙어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소회가 전 같지 않다. 세상을 더 살아 그리 보이는 건지 실제 그런 건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게 새삼스럽고 팍팍하기만 하다. 우리가 보는 과거는 과거에 과거를 보았던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것이다. 아무려나, 좋은 기억만 갖고 갈 순 없겠지. 어쨌든. 결심 같은 건 안 할 결심 말고, 몇 가지 결심. 하매 안 먹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만, 무엇보다 먼저, 꽃 피는 봄이 올 때까지 술을 멀리하겠다. 그리고 몸을 쓰고, 볕도 좀 쬐어야겠다. 아침저녁 팔 굽혀 펴기라도 꾸준히 하고 다시 좀 걸어야겠다. 말을 아끼고, 더듬더듬 세상과 주변을 돌아봐야겠다. 아이들이랑 많이 놀고, 어른들을 자주 뵈어야겠다. 그래, 숨도 좀 천천히 쉬어야겠다. 작은 설, 동지를 지나며 안 먹던 팥죽도 먹었으니 나이도 제대로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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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우주 2

from text 2015/11/25 11:45
어제 가을의 끝을 붙잡고 한잔했더랬지요. 내가 놓아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나오는 길에는 겨울이 와 있습디다. 술집에서는 모처럼 생각의 여름과 김윤아를 청해 들었습니다. 만삭의 젊은 안주인은 무엇이 즐거운지 내내 웃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각자 자기만의 하루를 털어내고 있었지요. 나는 다른 우주를 꿈꾸었답니다. 기억을 더듬었더니, 거기, 남겨두고 돌아왔던 내가 있습디다. 부서진 돌가루처럼, 아직도 남아 있습디다. 꽃을 거들듯 짐짓 향만 사르고 못 본 체 돌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아쉬웠던지 일행을 데리고 굴 속 같은 집으로 들어와 기어이 고꾸라지고 말았지요. 이 아침에는 비가 오고 쌀쌀한 바람이 붑니다. 나는 언제나 미더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하긴 굽은 것도 곧은 게 모인 것이고, 곧은 것도 들여다보면 저마다 굽어 있을 겁니다. 점심, 든든하게 챙기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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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from text 2015/11/23 22:42
절정에 이르러 너를 만나지 못하였다. 빨간 원피스, 가지런한 두 다리에 눈이 멀었다. 보고 싶었다. 글쎄, 세상은 아름답지도, 추하거나 흉하지도 않더라. 올가을은 유난히 길었다. 일찍 와서 끝내 버텼다. 마르게 시작하여 오래 눅눅하였다. 내내 흐리거나 비를 뿌렸다. 몇몇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고, 나머지는 애써 돌이키지 않았다. 서둘렀던 꽃무릇은 지난가을이 더 야속했을까. 보내거나 남은 이들은 무사하였을까. 코스타리카 따라주를 들고 옅은 현기증과 미열을 즐긴다. 철새 같은 음악이 흐르는 통창을 두고 안팎이 나뉜다. 풍경일 때, 거리를 둔 사물일 때 비로소 네가 궁금하다. 금방이라도 눈발이 날릴 것만 같은 하늘, 오후 네 시가 저문다.

꽃무릇을 두고

from text 2015/11/09 16:52
안경을 벗고 홀로 자리에 누우면 타임머신이 따로 없다. 왼쪽으로 잠시 뒤척이면 금세 일이십 년을 거스르고,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면 먼 앞날이 문득 다가선다. 이도 저도 싫어 똑바로 천장을 향하면 그때의 내가 빤히 떠 있다.

가을이 저문다. 가을이 저물어 네가 울고, 네가 울어 날이 저문다. 산이 무너진다. 가위도 정이 드는가. 나는 두려움이 두렵다. 길은 몇 갈래, 너를 두고 이 길을 간다. 푸르게 꽃무릇을 밟고 간다. 마음이 지척이라 가는 길이 멀다.

똑똑

from text 2015/10/13 05:09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어떻게 자랄까?

텃밭 같은
내 마음.

폭음을 삼가고

from text 2015/10/02 09:52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은 지 십삼 일째였다. 종일 참하게 비가 내린 날이었다. 먹자는 사람은 많고, 날씨 핑계로 제대로 흔들렸다.

술이 몇 가지요 청주와 탁주로다
다 먹고 취할선정 청탁이 관계하랴
달 밝고 풍청(風淸)한 밤이어니 아니 깬들 어떠리

신흠의 글이다. 다음은 정철.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에 만인이 울며 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쌀쌀한 바람 불 때
누가 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0124님에게 두 글을 보냈더니, 잠시 후 도착한 답. 흉내 내어 써보았단다.

마신들 무엇하리
헛헛한들 어떠하리
다 녹도록 마셔봐야
숙취 말고 무어더냐

다 일리가 있고 그럴듯하다. 하매 좋은 계절이다. 폭음을 삼가고 반주처럼 즐길 일이다.

건강하고 꿋꿋하게

from text 2015/09/25 09:40
서연이 학교에서 도시락 데이를 맞아 사랑의 편지나 메모를 함께 전해달라는 선생님의 요청이 있다하여 간밤에 급히 쓴 편지.

서연아. 너를 처음 만난 날과 처음 글자를 읽던 날을 기억한다. 홈스파월드 찜질방 한쪽, 처음 우리가 논쟁을 하던 날을 기억한다. 그 어린 나이에 의견이 맞서자 제 논리를 갖고 다투는 게 대견하기만 했다. 학교에 들어가 일학년이 되었을 때, 계명대학교 바우어관에서 처음으로 바둑대회를 우승하고 달려와 우승, 우승을 외치던 모습과 기차를 타고 문경까지 가서 일박한 날, 연이은 우승을 마감하고 품에 안겨 울던 너를 기억한다.

어디 너를 기억하는 것이 그뿐이겠는가. 섬세한 감정선에 반짝이는 촉을 가진 아이. 네가 기억 못할 어린 날, 너는 유독 점잖은 아이였다. 아빠의 어린 날을 한 번씩 돌아보다 보면 불현듯 나를 닮은 너를 만난다. 반갑고 기쁜 한편 아빠가 갖지 못한 깊고 너른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한단다.

앞으로 더 많은 독서와 교유, 그리고 상상도 못한 다양한 경험을 할 것이다. 언제나 그것이 무엇이든 곱새기고 되돌아보며 꿈을 잃지 않길 빈다. 칼끝 앞에서도 굴하지 않을 것처럼 강한 자 앞에 당당하고, 너에게 손을 내밀듯 약한 자와 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남의 장점을 볼 줄 알고 언제나 겸허하며 나의 단점을 살피고 삼갈 줄 알아야겠다. 두루 친구를 만나되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를 가져야겠다.

별처럼 무수히 빛나는 날들과 그 사이 같은 어둠, 때로 달처럼 이지러지고 차오를 날들이 있을 거다. 네가 만날 미래가 부럽고 궁금하구나.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고, 너를 믿는다. 건강하고 꿋꿋하게. 사랑한다, 서연아.

가을의 바람

from text 2015/09/14 20:18
늙었다기엔 젊고 젊다기엔 늙었구나. 늙은 체 하기엔 아쉽고 젊은 체 하기엔 마음이 이미 따르지 않는다. 어느새 가을이라 가을의 바람이 불고 민달팽이도 제 집을 찾는다. 먹을 것을 잃고 검은 새는 길을 떠난다. 전신주가 기우뚱 수직을 눕혀 떠나는 길을 배웅한다. 해는 다시 뜨지 않을 것처럼 그 끝에 걸렸다. 봄날 아지랑이처럼 풍경이 흔들리고 세상도 한 살 더 먹는다. 저도 갈 길 없이 늙었으리라. 그날부터다. 낮에도 네 그림자가 길다.

지난 세기

from text 2015/08/26 23:07
다시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고 검은 새가 도시를 선회한다. 길 끝으로 길을 불러 지난날을 노래한다. 지난 세기를 보낸 사람은 다음 세기를 맞지 못한다. 폭력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선생님. 취한 사내가 세계를 잠시 흔든다. 불길한 계집과 주인 잃은 거미집이 그림자처럼 떤다. 달이 뜨고 사랑이 진다. 젖은 사내는 오늘 거미집에 계집 같은 잠을 청할 게다. 나도 길 끝에서 술을 얻고 옛 노래를 들어야지. 돌아오는 길에는 낯선 길이 길게 이어질 테다. 나에게도 불안한 계집처럼 불길한 사랑이 깃들 테다. 아무렴, 검은 새가 곤두박질치고 바람이 바람을 불러 함께 운다.

칠석

from text 2015/08/20 23:19
흐리고 비가 온다. 나는 담배 연기를 내뿜어 흐림을 더한다. 술을 불러 너를 만난다. 잊지 않을 것이다. 술을 부르던 너나 네 이웃이 아니라 나, 그리고 나의 이웃을. 비가 내리고, 너를 피하고, 내가 눕던 날. 그렇게 먼산에 나도 눈이 멀었다.

입추

from text 2015/08/08 15:12
여름이 가고 있다. 어느 마음처럼, 짧은 매미의 일생처럼 덧없이 가고 있다. 며칠 아이의 생애와 나의 어린 날을 생각했다. 만남과 인연에 대해, 남은 날들에 대해 오래 돌아보았다. 어제는 바짝 마른 하늘에 천둥이 꼭 그렇게 울었다. 제 덩치의 몇 백배 되는 꽃매미 사체를 끌고 가던 개미와 음악당의 뜨거운 백색 시멘트 벽에 껍질로만 남은 달팽이를 떠올렸다. 거기 노랗게 피었던 개나리 무리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름이 가고 있었고, 앞날을 예감한 듯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기도 하였다. 봄이나 겨울 따위 더는 모를 일이었다.

절명을 기다리듯

from text 2015/07/09 16:21
몸에서 살 썩는 냄새가 난다. 알코올을 그리 들이부었건만. 그래, 이대로가 좋은 거다. 아쉬움도 그대로 두고, 그리움도 접어 두고.

다음은 최하림의 나는 뭐라 말해야 할까요? 전문.

우리는 많은 길을 걸었습니다 아침이면 등산화 끈을 질끈 조여매고, 여름 햇살을 등지고 월령산을 넘어 꽃무덤에 이른 때도 있었고, 덕유산 아래 갈마동에서 눈이 내리는 저녁을 보는 때도 있었습니다 12월이 지나고 1월이 오면 중북부 지방에는 복수초들이 눈 속에 솟아오른다지만, 우리는 겨울 내내 방 안에 박혀 티브이만 보았습니다 다시 봄이 다가와 돌담 아래 민들레꽃이 피어날 때에야 간신히 골목을 빠져나와 실크 머플러와도 같은 햇빛을 목에 두르고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는 강둑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물이거나 바람이거나 햇빛처럼 반짝였습니다 우리 몸에서는 수많은 모세 혈관들이 입을 열고 햇빛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버들강생이들도 입을 열었습니다 순간 폭포수와도 같은 소용돌이가 일었습니다 어떤 것도 정지하거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이 변화를 뭐라 말해야 할까요? 내가 발을 멈추고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나는 뒤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내가 뒤돌아보며 감정의 굽이를 돌아갈 때, 그대 모습은 사라지고, 나도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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