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75건

  1. 형법 제241조 2015/02/26
  2. 서녘 비골 2015/02/14
  3. 낙하 2015/01/31
  4. 안녕 2015/01/28
  5. 고양이와 캐모마일 2015/01/17
  6. 새벽 세 시 2015/01/06
  7. 적막으로 가는 길 2015/01/04
  8. 다른 모든 것처럼 2015/01/04
  9. 열린바다배 2015/01/03
  10. 어떤 마음 2014/12/31
  11. 차면 반드시 넘친다 2014/12/29
  12. 첫눈 2 2014/12/01
  13. 술과 죽은 노래를 2014/11/18
  14. 휴일 일기 2 2014/11/16
  15. 꿈길 2014/11/14
  16. 매화산 2014/11/02

형법 제241조

from text 2015/02/26 17:55
1988년, 1학년 때의 일이다. 학내 농성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이 이런저런 얘기 끝에 세 학번 이른 같은 과 4학년 형이 뜬금없이 간통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형은 무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선배의 하나였고 학년 차이가 있어 자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던 터였다. 나는 각자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여 법으로 강제할 일은 아니라고 답했고, 그 형은 여성의 지위와 대우가 상대적으로 낮은 우리 사회의 여러 풍토와 여건을 이야기하며 약자에 대한 옹호를 들어 그 법률이 필요함을 이야기하였다. 자유주의적인 내 성향을 우려하여 일부러 꺼낸 얘기였던 지도 모르겠다. 사회 속의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 나아가 사회적 참여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타고난 성향이야 어디 갔을까마는 실제 그 이후 어떤 사안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그 일의 사회적 맥락이나 힘의 관계 등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는 버릇이 들었었다.

헌법재판소가 1953년 제정되어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형법 제241조(간통)에 대하여 1990년부터 2008년까지 네 차례의 헌법재판에서 합헌으로 판단했다가 오늘 위헌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난 일이다. 물론 지금이라면, 아니 훨씬 이전에 그 형도 우리 사회를 다시 돌아보고 지금의 헌재와 같은 판단을 내렸으리라. 1905년 공포된 대한제국 형법대전이나 1912년 제정된 조선형사령에서는 유부녀의 간통만을 문제 삼았다 하니, 법률의 역사와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모처럼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 앞 화단의 매화가 곧 망울을 터뜨릴 모양이다. 계절은 다 같이 누리는 것이겠지만 모르긴 모르되 차리는 놈은 따로 있을 테다. 몰래 가만히 준비하는 놈도, 스미는 것도 다 따로 있을 테고.

서녘 비골

from text 2015/02/14 17:10
낮달 떴으니 낮술 한잔 먹는다. 어디서 북 소리, 방망이 소리, 꽝꽝 무언가 가르는 소리. 허망한 꿈을 꾸었구나. 동녘 운산, 북녘 눈뫼, 서녘 비골, 남녘 유리, 어디로든 떠나고픈 마음에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다시 펼쳤다가 비골에 한참 눈이 멎었다. 그렇지, "지렁이는 흙밑 습습한 곳에서라야 세상은 안온하다고 하는 것"이지.

바다가 있고, 산이 거기로 내려가다 발목만 잠그고 멈춰서 버린 저 비골에서는, 늘 젖고, 늘 울었지. 술에도 젖고, 생선 비린내에도 젖고, 계집 흘린 눈물에도 젖었더라구, 거기는 글쎄, 여덟 달간이나 비가 온다고 하잖던가? 남는 넉 달 중에서도, 청명한 날 찾기는 어려운데, 어쩌다 끼어드는 청명한 날은, 무슨 염병이나 간질병 같은 것이지. 그 여덟 달 동안의 젖은 바람은, 뼈마디마디에다 해풍과 습기와 관절염만을 불어넣는 것만은 아니라구 글쎄. 어떤 청명한 다음날에, 사람들은 자살을 해 버리지. 글쎄 어떤 사람들은, 무참히도 자기 목숨을 끊어 버리더라구. 비가 내리지만 그렇다고 한번도 줄기찬 법 없는, 저 습습하며 어두컴컴하고, 뼛속에 곰팡이가 피어 가는 저 모든 것을 상상해 보시란 말이지. 글쎄 겨울이란대도 혹독히 추운 법 없어, 노숙 끝엔 가벼운 감기나 걸릴 정도인 것이며, 여름이란대도 무참히 더운 법 없어, 노숙 끝엔 한번 더 감기나 걸릴, 그런 고장의 저 음산한 거리며, 낮은 추녀 밑에는, 언제나 웅숭그리고 있는, 썩는 듯한 어두움이며, 헌 가구의 냄새며, 개까지도 웅숭그리고 지나며, 나뭇가지도 뼈를 아파해쌓는, 글쎄 그런 고장을 상상해 보란 말이지. 그런 어떤 날, 느닷없이, 하늘이 그냥, 푸르게 엎질러져 버리고, 길이며 지붕 꼭대기들이 아주 낯설게 뻔적이는 것이오. 거기서 또 떠났구료 나는 엥, 그것도 자살은 아니었을까 몰라. 젠장 떠난 건 떠난 거니껜.

낙하

from text 2015/01/31 22:09
세상의 모든 비밀을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거리낌없이 서로를 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세로줄로만 투명한 집을 짓던 수거미가 잠시 쉬는 사이, 어딘가에 단단히 붙어 있던 돌덩이 하나가 떨어져 가을날 잎사귀처럼 돌돌돌 굴렀다. 더는 누가 필요하지 않아도 돌아갈 집은 있어야지. 오롯이 제힘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그를 보며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을 사이에 두고 암거미가 끈적이는 가로줄을 거둬 모질게 제 몸에 감고 있었다.

안녕

from text 2015/01/28 19:38
말을 많이 한 날 밤은 공허하다. 그럴듯한 말을 한 날은 더욱 그렇다. 역시 덜 깬 상태가 덜 취한 상태를 능가한다. 멀리 있는 술집도 가지 않는 내가 오늘은 멀리 있는 너를 그린다. 지나는 문장마다 너를 생각하며 빼거나 더한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온전히 내가 나였던 시절, 고스란히 나의 전부를 던졌던 그때. 철없이 겁도 없이 내닫다 내일도 없이 주저앉기도 했지만, 선홍의 꽃을 끝내 대궁 끝으로 밀어 올리기도 했다. 치열하게 울고 허무하게 지기도 했다. 세상을 버리고 너를 버리고 갈 일이 아득하다. 완벽주의자, 완벽한 현실주의자는 우울로 스스로를 버릴 수밖에 없다더라만, 비어야 채울 수 있다는 거짓말을 믿기로 한다. 세상아, 너를 만나 즐거웠다. 취할 수 있어 좋았다. 기다려라. 이제 너에게 다른 세상을 알려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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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캐모마일

from text 2015/01/17 14:25
이제 너와 난 손도 잡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절망처럼 눈이 내렸고 인적 없는 거리는 음식물 쓰레기처럼 나뒹굴었다. 목적을 달성한 도둑고양이가 다음 목적을 찾아 내세에 몸을 숨긴다. 무언가 단단히 바라는 것이 있었을까. 너를 대할 때만큼 긴장한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 다른 모든 일은 후순위였다. 너와 나를 두고 세상이 뱅그르르 돌던 날, 심장 한구석에 고양이 수염 같은 게 자랐다. 단 한 번도 술잔을 놓고 마주한 적이 없구나. 모락모락 캐모마일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너를 따라 적막으로 사라져도 좋을까. 그만하면 오래 아팠으니, 모른 척 뜨거운 것 모두 두고 따르면 될까. 어느새 우린 손도 잡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딱 그만큼의 거리를 찾았다.

새벽 세 시

from text 2015/01/06 04:29
새벽 세 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차례를 지켜 아파트 103동이 광장으로 들어서고, 연말부터 수목을 장식하던 알전구들이 마구 스스로를 흔든다. 마음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마음의 결은 거미줄 같아 얼마나 섬세하고 위험한가. 무엇이 거미처럼 도사려 끈적이며 성가시게 목숨을 노리는가. 고장난 보일러가 집요하게 돌다 멈추길 반복한다. 빗소리가 단호하다. 104동이 들어서다 멈칫, 하늘을 본다. 멀리 희끄무레하게 때 이른 동이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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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으로 가는 길

from text 2015/01/04 22:29
미련과 욕심을 버리고 가는 거다. 어차피 가뭇없는 일, 떠날 때는 그렇게 두고 가는 거다. 무릇 모든 이별은 솔직한 독백. 하직은 언제나 이른 것이지만 거짓으로도 붙들 길이 없을 때면 웃으며 가는 거다. 그때 더는 비빌 언덕이나 한 걸음 디딜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도 좋겠다. 괜찮은 삶이었을까. 그늘도 되고 볕이 되기도 했을까. 전하지 못한 말, 헤아리지 못한 마음은 없을까. 적막으로 가는 길, 다 떠나 홀가분할 수 있을까.

다른 모든 것처럼

from text 2015/01/04 00:07
오랜 옛날, 느린 여자를 알았다. 행동만 느린 것이 아니어서 행동이 지나고 한참 후 사고가 따라왔다.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느린 행동은 자주 시간을 되돌렸고, 행동에 대한 판단은 미뤄야 했다. 뒤이은 사고가 행동을 뒷받침하고 행동에 대해 해명하였기 때문이다. 뒤에 설명하는 행동이란 얼마나 정당한가. 언제나 화두는 이것이다. 사고가 앞서 행동이 따르지 못할 때, 느린 여자는 알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위로와 위안이 어떻게 종말을 고하는지.

사고가 행동을 멈추었을 때 다시, 느린 여자를 알았다. 하지만 이미 행동도 사고를 멈추었고 다른 모든 것처럼 너무 늦게 알았다. 바람이 지나는 자국에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열린바다배

from text 2015/01/03 23:02
제3회 열린바다배 전국 어린이 바둑왕전 참가를 위해 서연이와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저도 지난여름 이후 오랜만의 대회 참가였고, 나는 대회장인 한국기원에는 처음이었다. 건물 외관과 계단의 사진들, 대국실 전경이 최근 미생에서 보고 그간 몇몇 자료에서 보아 온 그대로였다. 2014년 전국 초등학생 랭킹 상위자와 한국초등바둑연맹 및 16개 시도협회 추천으로 모인 32명이 열띤 대국을 펼치는 동안 대국실 밖 대기실과 복도에는 여러 도장 관계자들과 학부모들이 서성거렸다. 표정과 몸짓은 제각각이었으나 내심은 같을 터, 아는 사람끼리는 안부와 격려가 오갔고 모르는 사람들은 애써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려운 경기이지만 기왕 먼 걸음에 16강 본선 진출만이라도 바랐으나 기대를 저버리고 2패로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네 명이 한 조씩 더블일리미네이션으로 치러진 예선, 접전 끝에 두 집 반을 진 첫 판의 아쉬움이 컸던지(상대는 이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두 번째 판은 저도 영 기대 이하의 승부를 가린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길 한참 풀이 죽어있더니 제대로 한번 바둑을 해보겠다는 각오를 밝히는데 이렇게 상기된 얼굴을 언제 보았나 싶었다. 한국기원을 제집 드나들듯 할 날이 있을까. 오면가면 눈이 침침하여 나이 먹는 걸 알겠더니, 승패에 일희일비할 일이야 아니겠다만, 갈 길이 멀고 아득하여 마음 둘 곳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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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

from text 2014/12/31 21:47
대저 어떤 마음은 어쩔 수 없어 억누르기도 한다. 누르고 눌러서 마음을 달래지만 누르고 눌러도 무뎌지지 않는 마음. 언제 그 마음이 꿈속에서라도 활짝 피어나기를, 일 년이면 열두 달 안타까이 수를 놓는다. 더러 얼룩진 마음을 말갛게 씻긴 채 팽팽한 줄에 널어 말린다. 그날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올해를 그것으로 기억할 것이다. 부끄럽지 않게, 오래오래. 한 해의 마지막 날, 짧은 시간 함박눈이 내렸고 고운 다짐이 내려앉았다.

차면 반드시 넘친다

from text 2014/12/29 19:38
대체로 그릇의 크기가 그 됨됨이를 결정한다. 제대로 얘기하자면 그 그릇의 온전함이 결정한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만, 어쨌든 이것의 부정적인 모습은 살아가면서 누차 확인하게 된다. 질투나 시기는 누구나 느끼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릇은 조막만 한데 욕심이 과한 인물은 큰일이라도 부여되면 기고만장하다 여지없이 무너진다. 제풀에 휘둘려 날뛰는 모습이라도 볼라치면 연민을 넘어 어떤 역겨움을 느끼기도 한다. 스스로 모를 리 없을 텐데, 알 수 없는 일이다. 저만 세상을 가소롭게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제 그릇을 알고 인생에 겸허한 인물을 만날 때면 그 크기를 떠나 한데서 물장구치며 노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많은 걸 함께 나누고 누릴 수 있다. 세밑, 오랜만의 포스팅에 이딴 걸 적고 있는 걸 보면 내 그릇도 옹졸하고 온전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만, 그렇다면 그릇의 성질은 때로 바뀌기도 하고 크기를 키울 수도 있는 것일까. 드문 일이로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돌아보건대 제 크기를 벗어난 어떤 일이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만 키우기도 하는 까닭이다. 물론 자신을 돌아보고, 조금은 세상을 두렵게 볼 줄 알아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겠지만.

노자 도덕경 15장에 대한 왕필의 주석에 차면 반드시 넘친다(영필일야, 盈必溢也)는 말이 있다. 본디 뜻이야 어떻든, 뭘 채우든 우선 그릇의 크기부터 늘리고 볼 일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말이지만, 주석이 가리키는 노자의 말마따나 채우려 하지 않던지(불욕영, 不欲盈).

모처럼 늦은 저녁의 사무실, 삼한사온이 사라지고 나이가 든 탓인지 유독 몸이 추운 겨울이더니, 마음 맨 밑바닥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따뜻한 기억이 올라온다. 주변이 온통 힘들고 아픈데 목도리를 친친 감고 가여운 사람 하나 모른 척 지나간다.

첫눈 2

from text 2014/12/01 16:03
첫눈이 아주, 잠깐 미친년처럼, 도시를 습격하였다. 12월의 첫날, 바람의 척후를 앞세워, 잠복하던 마음들을 깨우고, 이후는 아랑곳없이. 호응하던 땅이 벌떡 일어나더니 더 깊이 내려앉았다. 그사이 철모르던 목련 꽃망울이 다쳤고, 게걸음을 치던 사람들은 품었던 걸 슬쩍 설수에 녹였다. 소식을 전하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이 없었다.

* 그 밤, 첫눈을 화제에 올렸더니 다들 아니라 하더라. 쌓이지도 않았다면서. 한참 우기다 돌아보니 나도 그랬겠더라. 당신, 만나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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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죽은 노래를

from text 2014/11/18 23:48
형식이 내용을 추동하매, 나는 이게 슬퍼 가을도 겨울인양 술을 부른다. 술도, 비슷하거나 다른 연유로 술이 마른 이들도 나를 찾는다. 불렀으나 외면하던 때를 생각하고, 그게 더워 나는 거절이란 걸 모른다. 누가 있어 어느 날 문득 손짓할 수 있다면, 응답을 듣지 못한대도 나는, 마냥 어린 아이처럼 설레고 들뜰 테다. 오랜 옛날, 누가 얘기하는 걸 들었지. 경계보다 아찔한, 날선 작두를 타며 술과 죽은 노래를 나누었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 그 노래에 사랑을 안고 떠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살을 발랐고, 노래에 칼을 품은 사람은 여기저기 묽은 피를 토하였단다. 죽음이 영원하다면 이 노래도 영원하리라. 머리칼이 자라듯 영원히 자라나리라. 영원의 죽음과 죽음의 죽음까지, 죽음이 영원하다면 이 노래 또한 영원하리라. 뼈가 발린 사람도 피를 마신 사람도 함께 푸르게 타오르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옛날이야기는 옛날에 숨이 멈추었는가. 죽은 노래가 생각나, 올 가을도 술을 불러 낮게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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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일기 2

from text 2014/11/16 22:12
어제 저녁 공짜표가 있어 엑스코 컨벤션홀에서 열린 생명존중 감성치유 콘서트를 보았다. 하루 연차를 낸 0124님, 서율이와 함께 이시아폴리스에 잠시 들렀다가 제32회 덕영배 전국아마대왕전 및 2014 덕영바둑축제에서 지역 연구생 교류전을 마친 서연이를 데리고 간 자리. 마술 공연에 이어 가수 션의 강연, 그리고 아이돌 그룹의 공연으로 이어지는 무대였다. 마술 공연에서 다들 유쾌하게 웃고 션의 강연에서 각자 눈시울을 훔치고는 아이돌 그룹의 공연 중간에 자리를 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근 봉봉해물탕에서 반주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소주가 맑았다.

오늘은 오후 늦게 코스트코에 장을 보러 가는 길에 어릴 때 들었던 카세트 테이프로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를 들었다. 힘을 잃은 햇살이 문득 비치는 사이로 옛일, 옛사람들이 지나갔다. 더러는 기억도 나지 않는 일들이 지금도 어느 구석에서 살아있는 게 느껴졌다. 구름이 흩어지다 뭉쳐서는 색깔을 바꾸었다. 휴일 코스트코에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돌아온 저녁, 스테이크를 구워 먹다 가장 입에 맞는 맥주를 찾았다. 반갑다, 칭타오.

꿈길

from text 2014/11/14 13:59
꿈길을 걸었다. 갈잎 가득 깔린 길. 오래 아문 아가미가 아렸다. 더러 따라 돌던 덧난 데가 덧터졌다. 무교는 나의 종교. 바람은 너의 노래. 신문지에서 활자가 떨어져 제멋대로 글자를 만들었다. 주워 담는 손이 뭉툭하여 애처로웠다. 황량한 마음에는 지킬 것이 없었고, 불에 덴 자국은 아프지 않았다. 끊어진 꿈길, 낭떠러지 아래는 벼랑이었다.

* 신호를 감지하고, 형식만 바꾸었으면 하고 바랐다. 크게 노력을 요구하는 일도 아니었고, 다만 하던 대로 안타까운 마음만 다스리면 될 일이었다. 내용까지 바꾸고자 하는 그 마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것은, 그 내용과 형식의 일치는, 처음 일치보다 위험해 보였다. 가장 안전한 위험. 어차피 낮은 수준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는 관계, 서로의 불일치는 안전도, 위험도 깨끗하게 제거해 버렸다. 그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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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산

from text 2014/11/02 18:27
어제 단체로 매화산에 올랐다. 산 아래는 단풍이 절정이었고, 산은 구름 속에 있었다. 중턱에서 만난 구름 속 풍경이 좋아 한참 머물다 혼자 내려오는 길, 구름이 내내 따라 내려왔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 잎 지는 소리가 딴 세상을 일러주는 것만 같았다. '모든 잎들이 꽃보다 아름다운 두 번째 계절', 몇 잔 술에 그걸 이해 못했을꼬. 천지사방 온통 하얀 세상은 그대로 어떤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