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일상 2015/06/17
  2. 춘몽 2015/05/20
  3. 어린이날 2015/05/05
  4. 꽃구경 2015/04/24
  5. 타이젬 9단 2015/03/29
  6. 봄날 하루 2015/03/22
  7. 어느 봄날 2015/03/17
  8. 블루베리 전정 2015/02/26
  9. 형법 제241조 2015/02/26
  10. 서녘 비골 2015/02/14
  11. 낙하 2015/01/31
  12. 안녕 2015/01/28
  13. 고양이와 캐모마일 2015/01/17
  14. 새벽 세 시 2015/01/06
  15. 적막으로 가는 길 2015/01/04
  16. 다른 모든 것처럼 2015/01/04

일상

from text 2015/06/17 16:53
요 며칠 출근 준비를 하거나 일을 하다가도 문득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 보면 즐겁게, 누구랄 것 없이 사이좋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전날이나 전전날 술이 덜 깬 영향도 있을 것이고, 최근 일상 같지 않은 날이 많아 더 그럴 것이다. 일터에 몇 년 만의 큰일이 있었고, 장조모께서 돌아가셨으며, 나라에는 이름이 무색한 전염병이 돌아 주변이 흉흉하다. 사람 사는 일이 한결같을 수야 없겠지만, 일상으로 살다가 일상처럼 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서연이는 제44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바둑 종목 참가로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제주도에 다녀왔다. 16강부터 시작하는 단체전 경기, 대구 남자 초등 대표팀은 대진 운이 비교적 좋았으나 8강에 머물고 말았다. 그래도 저는 상대팀 1장하고만 맞붙어 2승을 하였으니 아쉬운 대로 만족할 만 하였다. 남은 시간에는 같은 학교 선수가 참가한 탁구팀을 응원하고, 성산포와 정방폭포를 둘러보고 온 모양이다. 용돈 갖고 간 걸 오로지 제 동생과 식구들 선물 사는 데 쓰고 비행기 연착으로 한밤중에 돌아온 녀석을 보고는 모처럼 아비의 시린 마음을 느끼기도 하였다.

춘몽

from text 2015/05/20 23:44
그만하면 봄날이라 부르기에 충분했다. 낮 기온이 삼십 도를 오르내린 전날이나 다음날의 꼭 절반이었다. 일기예보를 비웃듯 종일 비가 내렸고, 기상청은 날씨를 중계하기에도 벅차 보였다. 못다 간 봄이 남긴 차마 마지막 봄밤인 듯 나는 애가 달았다. 오래된 어느 모퉁이, 기품과 위엄을 잃지 않고 이미 홀로 선 나무를 보았다. 잠시 흔들리던 물빛 줄기와 단단한 뿌리를 보았다. 아무렇게나 기대 그저 같이 흔들리고만 싶었다. 오래 흔들고도 싶었다. 가지 하나쯤 아무도 몰래 꺾고만 싶었다. 다음 세상일랑 없답니다. 살아서 다시 만나요. 계절은 감당할 것만 감당하였고, 가만히 가야금 섞인 노래를 들려주었다. 아무도 없는 밤이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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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from text 2015/05/05 23:03
어린이날, 서율이는 0124님이랑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이이팔기념중앙공원, 진골목 등지에서 놀고, 서연이는 나와 함께 새벽부터 서둘러 서울 방이동 SK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제4회 일요신문배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에 참가하였다. 조별 예선 리그와 본선 토너먼트로 펼쳐진 최강부 경기. 3승으로 비교적 가볍게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 첫 경기인 16강전에서 지난 열린바다배 첫 상대이자 그 대회 우승자와 맞붙어 반집 승을 거두었다. 굵직한 전국대회에서 이제야 성적을 좀 내보나 하는 기대를 가졌으나, 이어진 8강전에서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공교롭게도 8강전 상대 역시 이번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돌아오는 길, 네가 우승 제조기로구나, 농을 하였다). 멀리서 표정이나 몸짓으로 형세를 짐작하며 한 수 한 수에 긴장하다 보면 늘 이게 참 할 짓이 못 된다 싶은데 오늘은 유독 그 정도가 심했다. 지켜보는 사람이 이럴진대 막상 승부를 가리는 저야 오죽할까만, 글쎄 어리고 여리기가 아비 같기야 할까 싶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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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구경

from text 2015/04/24 18:06
해마다 봄이면 생각날 거야.
어쩌면 오래 미뤄도 좋겠다.

꽃구경에 대한 심사를 이렇게 두 줄 써놓고 두 주 가량이 지났다. 4월 16일 전후로 무얼 더 쓰기가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드러낼 말은 아니지만, 새삼 누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나방이 나비를 본 것 같은 날이 지난다. 거인의 꿈에 나는 그저 꿈틀거리는 한 마리 송충이일 뿐이다.

일찍 찾아온 봄이 유난히 궂은 날씨를 보이더니 서둘러 물러가나 보다. 너를 만나 무얼 했는지는 몰라도 다시 꽃처럼 찾아올 걸 안다. 마주앉아 나눈 꿈같은 얘기 그날로 다 잊어도 마주할 날을 기억하듯이. 그래, 세상 구경이 너를 보는 것만 하랴. 다채로운 봄날, 나를 보고 너를 본다. 버즘나무도 새잎은 저리 예쁜데, 살아있는 게 이리 수상하다.

서연이가 5월 30일부터 제주도에서 열리는 제44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 바둑 초등부 남자 단체전 대구 대표로 선발되었다(바둑은 올해 처음 정식 종목이 되었고, 단체전으로만 치른다). 4월 5일 시민체육관에서 열린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다니는 학교에 현수막도 걸렸다. 막상 저는 그리 소원하던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도 기쁜 내색이 별로 없던데, 아비는 자식 이름자가 박힌 거라고 지날 때면 매번 처음 보는 듯 쳐다보곤 한다. 날로 녀석을 읽을 일이 아득해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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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젬 9단

from text 2015/03/29 20:50
서연이가 지난 3월 26일 처음 타이젬 9단에 올랐다. 오르자마자 내리 3패를 하였지만 이튿날엔 첫 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6단에서 7단 갈 때 한 번 미끄러지고 7단에서 8단 갈 때 두 번 미끄러졌으니 딱 서너 번 정도만 미끄러지고 안착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새 벚꽃도 피었더니만, 봄은 봄인 모양이다. 술 먹고 돌아다니다 어디서 체체파리한테라도 물린 듯 휴일 한낮 내내 졸다 깨다 자다 깨다 하였다. 0124님 없는 동안 세 부자의 하루하루가 길었던가. 자주 술 퍼먹는 와중에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깨더니 쌓인 피로가 컸던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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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하루

from text 2015/03/22 22:39
김윤아의 이상한 이야기와 비밀의 정원을 반복해 들었다. 어린 시절 본 티브이 인형극 주제가의 애달픈 곡조를 닮았다. 그 곡조가 김윤아의 신 내린 목소리를 만나 늦은 바람처럼 사람을 흔든다. 늦은 바람이 흔든다고 흔들릴까만, 좁은 견문에 새가슴이 무너질 땐 이렇게 속절없다.

가고 오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라. 애당초 오고도 가지 않을 거라 믿지 않았다. 황사만 봄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매화, 산수유에 이어 동백도 피고 목련도 피어 봄은 알록달록 사연이 많았다. 누구는 돌아서고 누구는 돌아서서 울었다. 봄밤이 싫어 내처 울기도 했다. 봄날 하루는 여름 여섯이요, 차마 겨울 열인 줄 진작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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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from text 2015/03/17 23:21
어느 봄날의 그 언덕, 난간에 기대 오래 누운 운동장을 본다. 꿈꾸듯 새잎 돋는 나무들 사이로 개나리꽃빛 플레어스커트가 나를 향해 나풀거린다. 동그란 눈동자, 동그란 안경이 어제처럼 선연하다. 들꽃도 피었던가. 아직 일러 라일락은 피지 않았지만, 우리는 삼월도 사월이었고 사월도 오월이었다. 반지하 조그만 동방 창은 얼룩덜룩 페인트 자국으로 남았고, 시너 향은 가시지 않았다. 중도에 이르는 길목마다 자판기에서 나온 종이컵이 넘쳤고, 언덕에서는 막걸리 밴 야전상의들이 빨래처럼 나부끼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나비처럼 쪼그려 앉아 물 묻은 날개를 접었다. 꿀을 탐하듯 소주를 마시며 언뜻 먼 나중을 보았을까. 새하얀 봄날, 샛노란 플레어스커트와 이 언덕을 돌아볼 줄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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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베리 전정

from text 2015/02/26 21:29
근육을 써라. 관절과 뼈를 이용하라. 볕을 쬐고 염분을 섭취하라. 뇌를 움직여 몸을 이동하라. 시간을 붙잡고 공간을 장악하라. 너를 놓아라. 세포를 분열하고 꽃목을 꺾어 뿌리를 단절하라. 이면을 보라. 미래와 결별하고 과거를 분질러라. 반상에 돌을 놓듯 잔을 놓아라. 나를 차단하라. 수맥을 뚫고 천천히 길을 놓아라. 울고 싶을 때 울어라. 그리고 조용히 숨을 놓아라.

형법 제241조

from text 2015/02/26 17:55
1988년, 1학년 때의 일이다. 학내 농성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이 이런저런 얘기 끝에 세 학번 이른 같은 과 4학년 형이 뜬금없이 간통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형은 무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선배의 하나였고 학년 차이가 있어 자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던 터였다. 나는 각자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여 법으로 강제할 일은 아니라고 답했고, 그 형은 여성의 지위와 대우가 상대적으로 낮은 우리 사회의 여러 풍토와 여건을 이야기하며 약자에 대한 옹호를 들어 그 법률이 필요함을 이야기하였다. 자유주의적인 내 성향을 우려하여 일부러 꺼낸 얘기였던 지도 모르겠다. 사회 속의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 나아가 사회적 참여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타고난 성향이야 어디 갔을까마는 실제 그 이후 어떤 사안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그 일의 사회적 맥락이나 힘의 관계 등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는 버릇이 들었었다.

헌법재판소가 1953년 제정되어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형법 제241조(간통)에 대하여 1990년부터 2008년까지 네 차례의 헌법재판에서 합헌으로 판단했다가 오늘 위헌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난 일이다. 물론 지금이라면, 아니 훨씬 이전에 그 형도 우리 사회를 다시 돌아보고 지금의 헌재와 같은 판단을 내렸으리라. 1905년 공포된 대한제국 형법대전이나 1912년 제정된 조선형사령에서는 유부녀의 간통만을 문제 삼았다 하니, 법률의 역사와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모처럼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 앞 화단의 매화가 곧 망울을 터뜨릴 모양이다. 계절은 다 같이 누리는 것이겠지만 모르긴 모르되 차리는 놈은 따로 있을 테다. 몰래 가만히 준비하는 놈도, 스미는 것도 다 따로 있을 테고.

서녘 비골

from text 2015/02/14 17:10
낮달 떴으니 낮술 한잔 먹는다. 어디서 북 소리, 방망이 소리, 꽝꽝 무언가 가르는 소리. 허망한 꿈을 꾸었구나. 동녘 운산, 북녘 눈뫼, 서녘 비골, 남녘 유리, 어디로든 떠나고픈 마음에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다시 펼쳤다가 비골에 한참 눈이 멎었다. 그렇지, "지렁이는 흙밑 습습한 곳에서라야 세상은 안온하다고 하는 것"이지.

바다가 있고, 산이 거기로 내려가다 발목만 잠그고 멈춰서 버린 저 비골에서는, 늘 젖고, 늘 울었지. 술에도 젖고, 생선 비린내에도 젖고, 계집 흘린 눈물에도 젖었더라구, 거기는 글쎄, 여덟 달간이나 비가 온다고 하잖던가? 남는 넉 달 중에서도, 청명한 날 찾기는 어려운데, 어쩌다 끼어드는 청명한 날은, 무슨 염병이나 간질병 같은 것이지. 그 여덟 달 동안의 젖은 바람은, 뼈마디마디에다 해풍과 습기와 관절염만을 불어넣는 것만은 아니라구 글쎄. 어떤 청명한 다음날에, 사람들은 자살을 해 버리지. 글쎄 어떤 사람들은, 무참히도 자기 목숨을 끊어 버리더라구. 비가 내리지만 그렇다고 한번도 줄기찬 법 없는, 저 습습하며 어두컴컴하고, 뼛속에 곰팡이가 피어 가는 저 모든 것을 상상해 보시란 말이지. 글쎄 겨울이란대도 혹독히 추운 법 없어, 노숙 끝엔 가벼운 감기나 걸릴 정도인 것이며, 여름이란대도 무참히 더운 법 없어, 노숙 끝엔 한번 더 감기나 걸릴, 그런 고장의 저 음산한 거리며, 낮은 추녀 밑에는, 언제나 웅숭그리고 있는, 썩는 듯한 어두움이며, 헌 가구의 냄새며, 개까지도 웅숭그리고 지나며, 나뭇가지도 뼈를 아파해쌓는, 글쎄 그런 고장을 상상해 보란 말이지. 그런 어떤 날, 느닷없이, 하늘이 그냥, 푸르게 엎질러져 버리고, 길이며 지붕 꼭대기들이 아주 낯설게 뻔적이는 것이오. 거기서 또 떠났구료 나는 엥, 그것도 자살은 아니었을까 몰라. 젠장 떠난 건 떠난 거니껜.

낙하

from text 2015/01/31 22:09
세상의 모든 비밀을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거리낌없이 서로를 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세로줄로만 투명한 집을 짓던 수거미가 잠시 쉬는 사이, 어딘가에 단단히 붙어 있던 돌덩이 하나가 떨어져 가을날 잎사귀처럼 돌돌돌 굴렀다. 더는 누가 필요하지 않아도 돌아갈 집은 있어야지. 오롯이 제힘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그를 보며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을 사이에 두고 암거미가 끈적이는 가로줄을 거둬 모질게 제 몸에 감고 있었다.

안녕

from text 2015/01/28 19:38
말을 많이 한 날 밤은 공허하다. 그럴듯한 말을 한 날은 더욱 그렇다. 역시 덜 깬 상태가 덜 취한 상태를 능가한다. 멀리 있는 술집도 가지 않는 내가 오늘은 멀리 있는 너를 그린다. 지나는 문장마다 너를 생각하며 빼거나 더한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온전히 내가 나였던 시절, 고스란히 나의 전부를 던졌던 그때. 철없이 겁도 없이 내닫다 내일도 없이 주저앉기도 했지만, 선홍의 꽃을 끝내 대궁 끝으로 밀어 올리기도 했다. 치열하게 울고 허무하게 지기도 했다. 세상을 버리고 너를 버리고 갈 일이 아득하다. 완벽주의자, 완벽한 현실주의자는 우울로 스스로를 버릴 수밖에 없다더라만, 비어야 채울 수 있다는 거짓말을 믿기로 한다. 세상아, 너를 만나 즐거웠다. 취할 수 있어 좋았다. 기다려라. 이제 너에게 다른 세상을 알려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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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캐모마일

from text 2015/01/17 14:25
이제 너와 난 손도 잡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절망처럼 눈이 내렸고 인적 없는 거리는 음식물 쓰레기처럼 나뒹굴었다. 목적을 달성한 도둑고양이가 다음 목적을 찾아 내세에 몸을 숨긴다. 무언가 단단히 바라는 것이 있었을까. 너를 대할 때만큼 긴장한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 다른 모든 일은 후순위였다. 너와 나를 두고 세상이 뱅그르르 돌던 날, 심장 한구석에 고양이 수염 같은 게 자랐다. 단 한 번도 술잔을 놓고 마주한 적이 없구나. 모락모락 캐모마일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너를 따라 적막으로 사라져도 좋을까. 그만하면 오래 아팠으니, 모른 척 뜨거운 것 모두 두고 따르면 될까. 어느새 우린 손도 잡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딱 그만큼의 거리를 찾았다.

새벽 세 시

from text 2015/01/06 04:29
새벽 세 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차례를 지켜 아파트 103동이 광장으로 들어서고, 연말부터 수목을 장식하던 알전구들이 마구 스스로를 흔든다. 마음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마음의 결은 거미줄 같아 얼마나 섬세하고 위험한가. 무엇이 거미처럼 도사려 끈적이며 성가시게 목숨을 노리는가. 고장난 보일러가 집요하게 돌다 멈추길 반복한다. 빗소리가 단호하다. 104동이 들어서다 멈칫, 하늘을 본다. 멀리 희끄무레하게 때 이른 동이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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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으로 가는 길

from text 2015/01/04 22:29
미련과 욕심을 버리고 가는 거다. 어차피 가뭇없는 일, 떠날 때는 그렇게 두고 가는 거다. 무릇 모든 이별은 솔직한 독백. 하직은 언제나 이른 것이지만 거짓으로도 붙들 길이 없을 때면 웃으며 가는 거다. 그때 더는 비빌 언덕이나 한 걸음 디딜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도 좋겠다. 괜찮은 삶이었을까. 그늘도 되고 볕이 되기도 했을까. 전하지 못한 말, 헤아리지 못한 마음은 없을까. 적막으로 가는 길, 다 떠나 홀가분할 수 있을까.

다른 모든 것처럼

from text 2015/01/04 00:07
오랜 옛날, 느린 여자를 알았다. 행동만 느린 것이 아니어서 행동이 지나고 한참 후 사고가 따라왔다.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느린 행동은 자주 시간을 되돌렸고, 행동에 대한 판단은 미뤄야 했다. 뒤이은 사고가 행동을 뒷받침하고 행동에 대해 해명하였기 때문이다. 뒤에 설명하는 행동이란 얼마나 정당한가. 언제나 화두는 이것이다. 사고가 앞서 행동이 따르지 못할 때, 느린 여자는 알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위로와 위안이 어떻게 종말을 고하는지.

사고가 행동을 멈추었을 때 다시, 느린 여자를 알았다. 하지만 이미 행동도 사고를 멈추었고 다른 모든 것처럼 너무 늦게 알았다. 바람이 지나는 자국에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