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열린바다배 2015/01/03
  2. 어떤 마음 2014/12/31
  3. 차면 반드시 넘친다 2014/12/29
  4. 첫눈 2 2014/12/01
  5. 술과 죽은 노래를 2014/11/18
  6. 휴일 일기 2 2014/11/16
  7. 꿈길 2014/11/14
  8. 매화산 2014/11/02
  9. 생일 2014/10/14
  10. 영천 유람 2014/10/06
  11. 대회 참가 일지 2014/09/22
  12. 동면을 위하여 2014/09/22
  13. 방앗간 전선 위의 참새 2014/08/14
  14. 천천히 2014/07/30
  15. 시실리 2014/06/10
  16. 1월 20일 2014/01/21

열린바다배

from text 2015/01/03 23:02
제3회 열린바다배 전국 어린이 바둑왕전 참가를 위해 서연이와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저도 지난여름 이후 오랜만의 대회 참가였고, 나는 대회장인 한국기원에는 처음이었다. 건물 외관과 계단의 사진들, 대국실 전경이 최근 미생에서 보고 그간 몇몇 자료에서 보아 온 그대로였다. 2014년 전국 초등학생 랭킹 상위자와 한국초등바둑연맹 및 16개 시도협회 추천으로 모인 32명이 열띤 대국을 펼치는 동안 대국실 밖 대기실과 복도에는 여러 도장 관계자들과 학부모들이 서성거렸다. 표정과 몸짓은 제각각이었으나 내심은 같을 터, 아는 사람끼리는 안부와 격려가 오갔고 모르는 사람들은 애써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려운 경기이지만 기왕 먼 걸음에 16강 본선 진출만이라도 바랐으나 기대를 저버리고 2패로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네 명이 한 조씩 더블일리미네이션으로 치러진 예선, 접전 끝에 두 집 반을 진 첫 판의 아쉬움이 컸던지(상대는 이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두 번째 판은 저도 영 기대 이하의 승부를 가린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길 한참 풀이 죽어있더니 제대로 한번 바둑을 해보겠다는 각오를 밝히는데 이렇게 상기된 얼굴을 언제 보았나 싶었다. 한국기원을 제집 드나들듯 할 날이 있을까. 오면가면 눈이 침침하여 나이 먹는 걸 알겠더니, 승패에 일희일비할 일이야 아니겠다만, 갈 길이 멀고 아득하여 마음 둘 곳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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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

from text 2014/12/31 21:47
대저 어떤 마음은 어쩔 수 없어 억누르기도 한다. 누르고 눌러서 마음을 달래지만 누르고 눌러도 무뎌지지 않는 마음. 언제 그 마음이 꿈속에서라도 활짝 피어나기를, 일 년이면 열두 달 안타까이 수를 놓는다. 더러 얼룩진 마음을 말갛게 씻긴 채 팽팽한 줄에 널어 말린다. 그날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올해를 그것으로 기억할 것이다. 부끄럽지 않게, 오래오래. 한 해의 마지막 날, 짧은 시간 함박눈이 내렸고 고운 다짐이 내려앉았다.

차면 반드시 넘친다

from text 2014/12/29 19:38
대체로 그릇의 크기가 그 됨됨이를 결정한다. 제대로 얘기하자면 그 그릇의 온전함이 결정한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만, 어쨌든 이것의 부정적인 모습은 살아가면서 누차 확인하게 된다. 질투나 시기는 누구나 느끼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릇은 조막만 한데 욕심이 과한 인물은 큰일이라도 부여되면 기고만장하다 여지없이 무너진다. 제풀에 휘둘려 날뛰는 모습이라도 볼라치면 연민을 넘어 어떤 역겨움을 느끼기도 한다. 스스로 모를 리 없을 텐데, 알 수 없는 일이다. 저만 세상을 가소롭게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제 그릇을 알고 인생에 겸허한 인물을 만날 때면 그 크기를 떠나 한데서 물장구치며 노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많은 걸 함께 나누고 누릴 수 있다. 세밑, 오랜만의 포스팅에 이딴 걸 적고 있는 걸 보면 내 그릇도 옹졸하고 온전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만, 그렇다면 그릇의 성질은 때로 바뀌기도 하고 크기를 키울 수도 있는 것일까. 드문 일이로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돌아보건대 제 크기를 벗어난 어떤 일이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만 키우기도 하는 까닭이다. 물론 자신을 돌아보고, 조금은 세상을 두렵게 볼 줄 알아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겠지만.

노자 도덕경 15장에 대한 왕필의 주석에 차면 반드시 넘친다(영필일야, 盈必溢也)는 말이 있다. 본디 뜻이야 어떻든, 뭘 채우든 우선 그릇의 크기부터 늘리고 볼 일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말이지만, 주석이 가리키는 노자의 말마따나 채우려 하지 않던지(불욕영, 不欲盈).

모처럼 늦은 저녁의 사무실, 삼한사온이 사라지고 나이가 든 탓인지 유독 몸이 추운 겨울이더니, 마음 맨 밑바닥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따뜻한 기억이 올라온다. 주변이 온통 힘들고 아픈데 목도리를 친친 감고 가여운 사람 하나 모른 척 지나간다.

첫눈 2

from text 2014/12/01 16:03
첫눈이 아주, 잠깐 미친년처럼, 도시를 습격하였다. 12월의 첫날, 바람의 척후를 앞세워, 잠복하던 마음들을 깨우고, 이후는 아랑곳없이. 호응하던 땅이 벌떡 일어나더니 더 깊이 내려앉았다. 그사이 철모르던 목련 꽃망울이 다쳤고, 게걸음을 치던 사람들은 품었던 걸 슬쩍 설수에 녹였다. 소식을 전하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이 없었다.

* 그 밤, 첫눈을 화제에 올렸더니 다들 아니라 하더라. 쌓이지도 않았다면서. 한참 우기다 돌아보니 나도 그랬겠더라. 당신, 만나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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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죽은 노래를

from text 2014/11/18 23:48
형식이 내용을 추동하매, 나는 이게 슬퍼 가을도 겨울인양 술을 부른다. 술도, 비슷하거나 다른 연유로 술이 마른 이들도 나를 찾는다. 불렀으나 외면하던 때를 생각하고, 그게 더워 나는 거절이란 걸 모른다. 누가 있어 어느 날 문득 손짓할 수 있다면, 응답을 듣지 못한대도 나는, 마냥 어린 아이처럼 설레고 들뜰 테다. 오랜 옛날, 누가 얘기하는 걸 들었지. 경계보다 아찔한, 날선 작두를 타며 술과 죽은 노래를 나누었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 그 노래에 사랑을 안고 떠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살을 발랐고, 노래에 칼을 품은 사람은 여기저기 묽은 피를 토하였단다. 죽음이 영원하다면 이 노래도 영원하리라. 머리칼이 자라듯 영원히 자라나리라. 영원의 죽음과 죽음의 죽음까지, 죽음이 영원하다면 이 노래 또한 영원하리라. 뼈가 발린 사람도 피를 마신 사람도 함께 푸르게 타오르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옛날이야기는 옛날에 숨이 멈추었는가. 죽은 노래가 생각나, 올 가을도 술을 불러 낮게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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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일기 2

from text 2014/11/16 22:12
어제 저녁 공짜표가 있어 엑스코 컨벤션홀에서 열린 생명존중 감성치유 콘서트를 보았다. 하루 연차를 낸 0124님, 서율이와 함께 이시아폴리스에 잠시 들렀다가 제32회 덕영배 전국아마대왕전 및 2014 덕영바둑축제에서 지역 연구생 교류전을 마친 서연이를 데리고 간 자리. 마술 공연에 이어 가수 션의 강연, 그리고 아이돌 그룹의 공연으로 이어지는 무대였다. 마술 공연에서 다들 유쾌하게 웃고 션의 강연에서 각자 눈시울을 훔치고는 아이돌 그룹의 공연 중간에 자리를 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근 봉봉해물탕에서 반주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소주가 맑았다.

오늘은 오후 늦게 코스트코에 장을 보러 가는 길에 어릴 때 들었던 카세트 테이프로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를 들었다. 힘을 잃은 햇살이 문득 비치는 사이로 옛일, 옛사람들이 지나갔다. 더러는 기억도 나지 않는 일들이 지금도 어느 구석에서 살아있는 게 느껴졌다. 구름이 흩어지다 뭉쳐서는 색깔을 바꾸었다. 휴일 코스트코에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돌아온 저녁, 스테이크를 구워 먹다 가장 입에 맞는 맥주를 찾았다. 반갑다, 칭타오.

꿈길

from text 2014/11/14 13:59
꿈길을 걸었다. 갈잎 가득 깔린 길. 오래 아문 아가미가 아렸다. 더러 따라 돌던 덧난 데가 덧터졌다. 무교는 나의 종교. 바람은 너의 노래. 신문지에서 활자가 떨어져 제멋대로 글자를 만들었다. 주워 담는 손이 뭉툭하여 애처로웠다. 황량한 마음에는 지킬 것이 없었고, 불에 덴 자국은 아프지 않았다. 끊어진 꿈길, 낭떠러지 아래는 벼랑이었다.

* 신호를 감지하고, 형식만 바꾸었으면 하고 바랐다. 크게 노력을 요구하는 일도 아니었고, 다만 하던 대로 안타까운 마음만 다스리면 될 일이었다. 내용까지 바꾸고자 하는 그 마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것은, 그 내용과 형식의 일치는, 처음 일치보다 위험해 보였다. 가장 안전한 위험. 어차피 낮은 수준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는 관계, 서로의 불일치는 안전도, 위험도 깨끗하게 제거해 버렸다. 그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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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산

from text 2014/11/02 18:27
어제 단체로 매화산에 올랐다. 산 아래는 단풍이 절정이었고, 산은 구름 속에 있었다. 중턱에서 만난 구름 속 풍경이 좋아 한참 머물다 혼자 내려오는 길, 구름이 내내 따라 내려왔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 잎 지는 소리가 딴 세상을 일러주는 것만 같았다. '모든 잎들이 꽃보다 아름다운 두 번째 계절', 몇 잔 술에 그걸 이해 못했을꼬. 천지사방 온통 하얀 세상은 그대로 어떤 얼굴이었다.

생일

from text 2014/10/14 17:03
단번에 무너질 줄 몰랐다. 그렇게 저릴 가슴이 남아 있는 줄 몰랐다. 겨우 지탱하고 있었던 게다. 어린 시절 그때처럼 한 번쯤 돌아봐 주기를 기다리며 오래도록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늘 아른거리던 것이 신기루 마냥 나타났다 사라졌다. 밤새 어느 구석에 적어 놓은 문장 하나가 맴돌았다.

일터의 웃어른께서 영면에 드셨다. 생전의 영상을 보며 몇 번이나 울컥하였다. 더 좋은 세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 시름은 다 내려놓고 편히 가셨으리라 믿는다. 서연이는 처음으로 제 용돈을 모아 향수를 선물했다. 카드에 쓴 '아버지를 응원하는 아들'에 마음이 뭉클했다. 이래저래 잊지 못할 생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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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유람

from text 2014/10/06 15:34
연휴 중 이틀을 영천 일대에서 놀다 왔다. 치산관광지 캠핑장을 0124님이 예약하는 바람에 갑작스레 잡힌 일정이었다. 예약이 그리 어렵다는데 누군가 취소한 걸 용케 잡은 모양이다. 대원이(서율이에게는 레고 삼촌 또는 뚱뚱보 삼촌)에게 숯과 토치를 빌리고, 소고기 등심에 삼겹살, 새우, 막창 등을 장만하여 가족 여행 기분을 냈다. 혼자서는 처음으로 숯불을 피워 보았는데 역시 불을 가지고 노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서연이는 계곡물에서 다슬기를 잡는 것에만 신이 났고, 서율이는 낯선 환경과 여러 먹을거리를 즐겼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구름 사이로 꽤 많은 별을 볼 수 있었다.

이튿날에는 은해사와 사일온천에 들렀다가 편대장 영화식당 본점에서 육회비빔밥을 먹었다. 은해사는 처음 가보았는데 절은 모르겠으나 울창하고 넓은 진입로가 좋았다. 주변에 오래된 참나무가 몇 그루 있어서 아이들이랑 경쟁하듯 꽤 많은 도토리를 주웠다. 애들이 하도 좋아해 굳이 하룻밤 묵지 않더라도 종종 이렇게 채집할 수 있는 나들이를 하면 좋겠단 생각을 하였다. 돌아와서는 잡아온 다슬기를 키우기 위해 장독 뚜껑에다 돌멩이 몇 개를 넣어 집을 만들어 주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또 군식구가 늘었다.

대회 참가 일지

from text 2014/09/22 17:15
서연이의 올해 대회 참가 일지. 타이젬 8단에서 두 번 미끄러지고 7단에서 정진 중. 다른 길을 걸었으면 어땠을까. 언제까지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정답 없는 고민이지만 결론이 해답일 터.

2월 23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202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2조 23위(2승 3패)
3월 21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203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2조 27위(1승 4패)
4월 13일, 고성동 시민체육관, 제6회 대구시장배 시민 바둑대회 최강자부 8강
5월 11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 제3회 일요신문배 전국어린이바둑대회 최강부 예선탈락(1승 2패)
5월 18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205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3조 7위(3승 2패)
6월 22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206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2조 24위(2승 3패)
7월 13일, 계명대학교 바우어관, 제14회 한화생명배 세계어린이국수전 대구지역 예선 국수부 1위
7월 19일, 포항 실내체육관, 제6회 영일만사랑배 전국 바둑대회 경북최강자부 우승
8월 3~6일, 공주 백제체육관, 2014 무령왕배 세계청소년바둑축제 초등최강부 공동우승
8월 7일, 서울 63빌딩 별관 그랜드볼룸, 제14회 한화생명배 세계어린이국수전 국수부 2승 3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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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면을 위하여

from text 2014/09/22 16:12
겨울은 또 어찌 나려고, 가을이 속절없이 깊어간다. 더는 술 먹고 고꾸라지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리라, 까르르 웃는 두 아이와 성실한 아내를 시체처럼 멀리서 바라보며 마음먹는다. 꿈이 무엇이고 인연이 무엇인가. 알량한 것 하나만 품고 멀리도 왔다. 덜어낸다며 채우고 채운다며 덜기도 했겠지. 난 체는 오죽했으랴. 중독된 시간만큼 해독에 시간이 필요할까. 그러고 나면 레고 장난감처럼 산산이 부서뜨려 다시 만들 수 있을까. 아이처럼 기껏 만들어놓은 걸 별일 아니라는 듯 간단히 해체하고 다른 걸 구상할 수 있을까. 지난날이 이리 어렴풋한데 분명한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밤이 깊으면 별은 더 반짝이고 새벽이 가깝다는데, 엊그제 고꾸라지기 전에 올려다본 하늘에서는 별이 제 운명을 노래하고 있었다. 땅에 발이 닿지 않는 나는 터져 나오는 노래를 억누르고 쥐며느리처럼 둥글게 몸을 말았다.

방앗간 전선 위의 참새

from text 2014/08/14 17:14
헐하고 허름한, 공중부양으로 하루를 견딘 우리가 지친 해를 위로하는 저녁, 젓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농담, 흘러간 가락에 비틀거리는 술잔, 무너지는 마음, 오지 않을 사람, 가고 싶은 나라, 보고 싶은 욕망, 중독처럼 피어나는 열꽃, 회한과 미련, 적막,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지처럼, 부서지는 운명처럼, 주인을 닮은 술집.

잘못 살아온 게 아닌가,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며칠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굴곡 없이 편하게 살아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새옹지마 같은 세상, 모쪼록 전화위복이 되기를.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없는 갓끈도 고쳐 매지 않기를. 종일 비가 내린 하루, 방앗간 전선 위로 간다.

천천히

from text 2014/07/30 13:33
어딘가 단절된 곳에서 한 몇 년, 적게 먹고 조금 걷고 그저 숨만 쉬다 왔으면 좋겠다. 비라도 주르륵 내리는 날이면 냉큼 무언지 모르는 것이 그리워 술이라도 찾아 힐끔거리겠지. 더러 소리 내어 울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어름이면 큰아이는 기리를 깨쳐 대성하여 있을까. 다른 길을 찾아 새로운 세상을 연마하고 있을까. 재롱 많은 작은아이는 어떤 사람을 만나 세상을 알아가고 있을까.

지난 주말이었다. 마른장마의 막바지, 구룡포읍 구평리 해변에서 짙은 해무와 차가운 바람을 맞는 호사를 누렸다. 해무가 맺혀 솔가지에서 물방울이 들을 정도였다. 분위기를 주체 못하고 밤새 주도삼매에 들던 중 잠시 들른 화장실에서 족히 십오 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지네에게 오른발 발가락을 물렸다. 일행에게 잡혀 변기통으로 사라진 주황빛 지네는 불로 지지는 듯, 가시로 찌르는 듯 꼬박 두 시간을 그렇게 아프게 하더니 물린 사람을 술 마시기 전의 몸뚱이로 만들어 놓았다. 열네 명이 정오부터 다음날 오후 서너 시까지 내달린 와중에 가장 많이 마시고도 가장 멀쩡할 수 있었던 건 다 그놈 덕분이었으리라. 뒤에 생각하니 그렇게 황천으로 보낼 일은 아니었다. 바닥을 잘 살펴보지 못한 내 잘못이지 제가 먼저 해코지하기야 하였겠는가. 길을 잘못 찾아든 제 탓도 없다 할 순 없겠다만, 늦게나마 명복을 빈다.

새로운 질서가 온다고 한다. 천천히, 나는 나의 질서를 지킬 따름이다.

시실리

from text 2014/06/10 16:22
오월은 여름이더니 유월이 봄이로구나. 일박이일 일정으로 고대하던 시실리엘 다녀왔다. 0124님이 모는 차로 처음 간 나들이, 애들이 좋아하고 운전에 믿음이 가 자주 다음을 기약하여도 좋겠다 싶었다. 공룡과 탁현이형의 여전한 모습도 반갑고 좋았다. 오는 길에는 가야산 야생화 식물원과 해인사에 들렀다. 해인사에는 사람이 넘쳐 그 옛날의 정취는 간 곳 없었고, 다만 늙은 나무들만 고요히 늙고 있었다.

대양을 떠돌다 온 준탱이, 이번에는 얼굴 한번 못 봤다. 중심 잃지 않고 잘 이기길 바란다. 녀석에게도 전한 말이지만, 지나고 보면 다 지나가는 일이더라. 뭔들 그렇지 않겠나. 다음은 최근에 읽은 이수태의 어른 되기의 어려움에서 기억할만한 한 토막.

그러나 모든 진실은 그것이 진실로 옹립되는 순간에 가장 위태로운 구도에 빠진다. 하나의 진실은 더 큰 진실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진실을 안고 있는 것만이 장벽도 될 수 있다. 악은 폐쇄된 선이고 선은 개방된 악이기 때문이다.

1월 20일

from text 2014/01/21 14:09
모든 게 다 용서될 것 같은 날씨, 물기를 잔뜩 머금은 눈이 세차게 내렸다. 산골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눈이었다. 꾸웍, 문어의 단말마 비명을 두 번 들은 밤이었다. 알코올이 피를 묽게 만들고 뇌수를 흔들어 놓았다. 그리운 얼굴 몇이 지나갔고, 아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모든 게 다 용서될 것 같은 날씨라고, 이걸 보라고.

응답하라 1994를 시작으로 셜록과 워킹 데드를 보고 덱스터에 빠져 있다. 잦은 좀비 놀이의 여파겠지, 건강검진에서 골감소증 진단을 받았다. 여전히 술, 담배에 햇볕을 잘 쬐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지만 처방약은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다. 이제 백 일쯤 되었구나, 0124님이 모는 낡은 자동차 덕을 조금씩 보고 있다. 다음은 여름 방학에 이어 두 번째 합숙에 들어간(보고 싶구나) 서연이의 기록 못한 대회 참가 일지.

6월 29일, 포항 실내체육관, 제5회 영일만사랑배 전국 바둑대회 유단자부 4강
7월 14일, 계명대학교 바우어관, 제13회 한화생명배 세계어린이국수전 대구지역 예선 유단자부 1위
8월 7일, 서울 63빌딩 별관 그랜드볼룸, 제13회 한화생명배 세계어린이국수전 유단자부 예선 탈락(1승 2패)
8월 17일, 울진군 체육관, 제1회 울진금강송배 전국 아마바둑 대축제 전국어린이유단자부 예선탈락(1승 2패)
9월 28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2013 문화체육관광부장관배 전국학생바둑대회 초등고학년부 예선탈락(2승 1패)
9월 29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197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4조 1위(5승 0패)
10월 5일, 용산 명문바둑학원, 제94회 전국체육대회 바둑종목 대구대표 선발전 어린이부 2강
10월 12~13일, 문경 실내체육관, 제8회 문경새재배 전국 아마바둑대회 전국초등유단자부 32강
10월 23일, 인천 신흥초등학교 체육관, 제94회 전국체육대회 바둑종목 어린이부 64강
10월 26~27일, 전주 전주고등학교 강당, 제15회 이창호배 전국아마바둑 선수권대회 전국어린이부 11위(5승 2패)
11월 24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199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3조 3위(4승 1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