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75건

  1. 어린 철학자 2010/01/31
  2. 가감단연 2010/01/11
  3. 수선화 2010/01/01
  4. 근황 2 2009/12/22
  5. 열하일기 2009/12/10
  6. 그때는 2009/11/22
  7. 대화 3 2009/11/14
  8. 노래 2009/10/26
  9. 가을, 문득 2 2009/10/03
  10. 지우개 5 2009/09/18
  11. 어떤 그리움 2009/08/19
  12. 어느 날 어느 때 2009/08/12
  13. 어쩌면 3 2009/07/27
  14. 여름 2009/06/26
  15. 우리는 누구나 2009/06/08
  16. 발자국 2009/05/24

어린 철학자

from text 2010/01/31 00:50
며칠 전 출근길. 아빠, 아빠는 몇 살까지 살고 싶어? 난데없는 물음에, 음, 백 살? 하고 대답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되물었다. 서연이는? 이즈음 어린 철학자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아빠 죽을 때까지. 아무 말도 더 하지 못하고, 그저 겨울 아침 공기가 후끈한 것만 같았다.

그보다 며칠 전에는 자려고 누워서 갑자기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하여 이유를 물었더니, 엄마 죽으면 서율이는 어떻게 해? 만약에 죽으면 어떡하냐고? 아빠도 죽을 거잖아? 했었다. 부쩍 그쪽으로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오늘은 나더러 이백 살까지 살란다. 저와 나의 나이 차를 꼽아보더니 자기는 백예순여섯까지 살 거라며. 서율이도 봐야 하니 너는 더 오래 살아라 했더니 그예 콧잔등이며 눈시울이 빨갛게 부어오른다.

이갑용의 길은 복잡하지 않다와 신현칠의 변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변하고 있다를 달아서 읽었다. 눈앞이 뿌예지고 가슴이 먹먹해 책에서 눈을 뗄 수밖에 없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나를 포함하여 주변이 온통 자유로울 수 없는 일이지만, 대개 한 줌의 부와 한 주먹도 안 되는 기득권에 기대 제 존재와 그 기반을 배반하는 가련함과 가상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한 터럭의 안락에 기대 예의와 염치로부터 순정과 열정에 이르기까지 깡그리 외면하고 욕망의 심층에 무릎을 꿇고 마는 것도 시대요, 유행인가. 이제 누가 있어 세계를 마음껏 재구성해 보란다면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떡하니 그려낼 수나 있을까. 다음은 신현칠이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에 관한 책에서 보았다는 시구.

나는 신을 보려고 찾았지만 / 보이지 않았다. /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려고 찾았지만 / 보이지 않았다. / 나는 고통하는 형제들을 만나서 / 신도 그리스도도 형제도 보았다. / 그리고 우리들은 함께 / 걸어가기 시작했다.

* 처음 사진집을 샀다. 재출간된 전몽각의 윤미네 집. 따뜻한 시선이 잔뜩 묻어나는 사진만큼이나 잔잔한 기품이 배어나는 글도 좋았다.

* 일요일 오후, 서연이와 함께 꼬마 니콜라를 보았다. 오랜만의 프랑스 영화, 제대로 킹왕짱이었다. 서연이도 벼랑 위의 포뇨 이후 가장 유쾌하게 본 듯.

가감단연

from text 2010/01/11 20:53
지난 주말 오랜 이 치료를 마무리 지었다. 지난해 이월부터였으니 꼬박 열한 달 만이다. 젠장맞을 이천구 년도 그예 저물었다.

심신이 많이 약해진 듯, 한번 시작한 미열은 오래 지속되고 약해진 심장은 작은 일에도 무턱대고 뛰고 본다. 나비처럼 팔랑대던 청춘들은 노란 불빛 앞으로 몰려가 저 먼저 부서졌다. 흔들리던 길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고 불빛은 빛나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무려나, 진보의 가치나 조화로운 삶의 가능성을 더는 믿지 않든 어쨌든 우선 좀 더 정직하고 볼 일이다. 끊을 건 끊고 이을 건 이어야 할 모양이다. 그리곤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하여야겠지. 그래,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마치 처음 의지를 시험하는 놈처럼.

*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숙취와 함께 어제 그제 죽음(과 가족)에 대한 담담한 정경과 드문 성찰을 보여주었다. 사랑 혹은 열병에 대한 아주 적절한 정의도 있었다. 둘로 이루어진 종교.

수선화

from text 2010/01/01 08:02
라일락 향기가 바람에 떠다니는 때란, 그 향기가 바람에 떠다니면서 청춘들의 후각을 자극할 때면, 그 어느 청춘인들,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없으리라. 꽃향기만으로 가슴 설레는, 그 고운 청춘의 시절에, 그러나, 나는, 그리고 해금이는, 해금이의 친구들은 참으로 슬펐다. 속절없이, 속절없이, 꽃향기는 저 혼자 바람 속에 떠돌다가, 떠돌다가 사라지고 나는, 해금이는, 해금이 친구인 우리는, 저희들이 얼마나 어여쁜지도 모르고, 꽃향기 때문에 가슴 설레면 그것이 무슨 죄나 되는 줄 알고, 그럼에도 또 꽃향기가 그리워서 몸을 떨어야 했다.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작가의 말 중에서. 아홉 송이 수선화는 그대로 다들 반짝이는 별이었다. 한때나마 별이었던 사람은 푸른 하늘을 보았던 기억보다 선명하게 스스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 남겨진 자들은 남은 과정을 갖고 있는 것. 그러게, 무슨 일에나 미학은 있는 법이니까(백경에서 이스마엘), 늦은 것도, 늦을 것도 없는 일이다.

근황 2

from text 2009/12/22 15:33
저가 봉오리를 피어난 것으로 바꾸기에 밤새 함께 울었더니, 떨어져 내릴 때는 맺혔던 자리마저 가져가누나.

준탱이 들어왔고 날은 추웠다. 마음은 늘어졌으나 몸은 바빴고(일에서는 마음만 바빴고 몸은 늘어졌던 듯) 술자리에서만 한두 대 피우던 담배는 일상으로 돌아왔으며 술은 배로 늘었다. 서연이는 바둑 7급 승급 심사를 받았고 서율이 재롱은 늘었으며 비로소 나는 늙었다. 그리움은 쓸쓸한 연기처럼 재빨리 일상이 되었고, 달라진 건 없으나 모든 게 달라졌다.

살아가는 일이란 늘상 사소한 것에서부터 틀어지거나 꾸며지기 마련, 한없이 부풀다 지극히 사소해져버린 작은 몸짓은 알 수 없는 불가항력에 계속 몸을 내맡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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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from text 2009/12/10 13:46
돌베개에서 펴낸 완역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었다. 덜 끝낸 숙제와 마쳐야 할 산더미 같은 일들을 두고, KBS 1FM 세상의 모든 음악이 흐르는 저녁에, 때로는 한밤중으로부터, 때로는 콧날 시큰한 새벽에, 풍류와 교양과 운치를 읽어 내렸다. 이스마엘과 퀴퀘그, 에이허브에 오래 빠져들던 사이 잠시 펼쳐나 본다던 것이 이미 시작한 여행길을 놓칠 수 없었던 것인데, 가히 민족문학사와 세계의 고전으로 치켜세울 만했다.

박지원의 모습은 유학의 뿌리가 워낙 질기고 깊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어렴풋이 갖고 있던 실학자의 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 시대에 세계를 주유하던 지식인들의 고졸한 품격은 아마도 (과학적)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리라. 아무렴, 충분한 근대적 안목의 미비(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허나 신분제를 위시한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없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보다 나을 것도 없는 체제에 살고 있으면서 그만한 인물과 담론이나마 찾을 길 없는 것은 행인가, 불행인가)를 아쉬워하기보다는 옛 사람의 산 같은 고담과 물 흐르듯 한 준론을 이렇게나마 엿볼 수 있음에 감사해야겠다. 다만 어제도 오늘도 없을 그 같은 담론의 자리와 그 곁자리에라도 끼일 수 없는 천박한 수준과 가련한 처지를 한탄할밖에.

열하일기를 읽던 어느 일요일 한낮, FM 우리가곡에서 테너 이영화의 겨울 강(한여선 시, 임준희 작곡)을 들었다.

마른 갈꽃 흔들며 겨울이 우는 소리
홀로 찾아와 듣는 이 누구인가
푸르게 흐르는 저 강물처럼
세월도 그렇듯 흘러갔거니
쓰러진 물풀 속에 길 잃은 사랑
하얗게 언 채로 갇혀 있구나
그 어느 하루 떠나지 못한 나룻배엔
어느 나그네의 부서진 마음인가
소리 없이 눈은 내려 쌓이는데
언 하늘 마른 가슴 휘돌아
또다시 떠나는 바람의 노래
나그네 홀로, 홀로 서서 듣고 있구나

아, 누구라서 이미 세상일을 알고 짐작대로 조각할 수 있을지언정 서로를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때는

from text 2009/11/22 19:09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을 보았다. 오랫동안 허먼 멜빌의 백경을 보는 중에 잠시 집어든 것인데 단숨에 읽고 말았다. 애틋함을 넘는 어떤 저릿함이 있었다. 영혜와 그녀, 경계에 대한 금간 얼굴들에 경의를. 다음은 책의 맨 끝부분에서 한 구절.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김애란의 소설집 침이 고인다와 달려라, 아비는 아껴 읽게 된다. 칼자국을 읽으면서는 서늘할 정도로 아름다운 말들의 잔치에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젠장, 백경을 썼을 때 허먼 멜빌의 나이가 서른셋이었고, 김애란은 80년생이다. 어제는 "햇살" 20주년 기념 파티가 있었다. 재학생과 졸업생 육칠십 명이 한데 엉겨 난장을 이루었다. 청년들은 살아있었고 모든 지나간 세대들의 우려는 역시 기우였다. 과연, 보태주는 것도 없으면서 함부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대화 3

from text 2009/11/14 00:55
포스팅도 뜸하고, 그저께 아침 밥상에서 제 어미와 서연이의 대화 한 토막.

어제 축구 누가 이겼게요?
음, 서연이 팀?
아니.
그럼 상대편 팀?
아니.
무승부구나?
아니.
그럼?
축구 안 했어. 바람이 그렇게 불고 추운데 축구는 무슨 축구?

임플란트 2차 수술을 끝내고 실밥 푼 지 일주일도 안 되었건만 방금까지 사흘 내리 술을 먹었다. 잔뜩 흐리거나 비도 간간이 뿌리는 날들, 어지럼증에 보름째 37.2도의 열은 가시지 않았으나 술맛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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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from text 2009/10/26 23:31
뒷울타리의 산수유꽃
흙담장 아래 코딱지꽃
부황든 들판의 보리꽃
수채구멍의 지렁이꽃
누이 얼굴의 버짐꽃
빚 독촉 아버지의 시름꽃
피는 봄밤에 몰래 집 나왔었는데
이젠 다시 살구꽃 피는
고향 그리워

김용락 선생의 시 고향 전문. 어제 신천을 지나 고산골로 해서 심신수련장 입구로 걸어 나오다 전류가 흐르듯, 끄트머리 길가에 걸린 이 꽃들을 만났다. 노래도 있다면서 그 옛날 문배형이 부르던 걸 기억하며 동행한 서연이에게 첫 소절을 불러주다 말고 왈칵 울음이 쏟아져 다 부르지 못하였다. 제대로 들어보고 싶어 찾아보니 같은 제목으로 민중문화운동연합의 노래모음 10집 '누이의 서신'에 실린 것과 코딱지꽃이라는 제목으로 2절 가사까지 붙인 백창우의 것이 있다. 책장에 꽂힌 그의 두 번째 시집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를 꺼내 살펴보니 뒷날개에 고향 그 노래가 김용락의 시였다니- 운운 메모가 있고, 염무웅의 해설에 첫 시집 '푸른 별'에 실린 시의 전문이 옮겨져 있다.

가을, 문득

from text 2009/10/03 23:07
나에겐 결정권이 없어. 인생은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을 했어. 다 거기서 초래된 일이지. 결산은 꼼꼼하고 조금의 빈틈도 없어.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도 지울 수 없어. 당신 뜻대로 동전을 움직일 수는 없지. 절대로. 인생의 길은 쉽게 바뀌지 않아.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더구나 없지.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중에서. 추석 연휴 전날, 벼르던 이사를 했다. 결혼하고 다섯 번째 집. 일이 되려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을 만큼 일이 맞물려 돌아가 한편 내몰리듯이 일이 진행되었다. 주공에서 미분양 아파트를 매입하여 임대하는 것으로, 첫째가 내년에 갈 초등학교는 거리가 좀 있어 아쉽지만 두 사람 직장이나 둘째를 봐주시는 어머니 댁에서 두루 가까워 좋다. 곱절 가까운 전세금에다 새로운 공간에 맞춰 거실에 소파며 책장을 들이고 낡은 세탁기를 바꾸고 아이 방에 침대와 책걸상, 책장 등을 놓으니 모양은 그럴듯한데 먹고사는 일이 새삼스럽다. 무릇 십만 원을 쓸 때 고민하던 것이 만 원 한 장 쓸 때 고민하게 되면 그것을 쓸 때 누리는 혜택과 즐거움은 물론, 더러 만 원, 십만 원이 생겼을 때 얻는 기쁨 또한 열 배는 될 터, 이제야 벌고 쓰는 재미를 제대로 배우려나 모르겠다만.

이달 말이면 이 별에서 꼬박 마흔 해를 보내게 된다. 빤히 치어다보는 가을, 문득 묻어나는 얼굴이 바람처럼 맵고 흐리다.

지우개

from text 2009/09/18 16:13
지우다 보면 지우는 지우개도 지워지기 마련, 지운 기억도 그렇게 지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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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리움

from text 2009/08/19 10:25
모든 게 아련하기만 하다. 이 여름은 누굴 닮아 지치는 기색도 없이 겨울처럼 아득하고, 어떤 그리움을 핑계로 또다시 퍼마신 날, 산도 들도 바람도 퍼렇게 멍이 들었었다. 다음은 정근표의 구멍가게 중에서 한 대목.

식이 아재는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그렇게 돈을 맡겨놓고 뒤뚱뒤뚱 가게를 걸어 나갔다. 그런 식이 아재의 뒷모습에서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세상을 밝히는 작은 빛을 보았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끙끙거리는 아이처럼 한동안 식이 아재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수록 머리가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이 세상에는 그때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목다운 거목이 갔다. 이로써 거인들의 시대는 다 가버린 듯.

어느 날 어느 때

from text 2009/08/12 23:47
가을 하늘이 푸르고 아름답다는
그저 그것만으로
어쩐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때는 없는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허무하게 땅에 떨어지는 분수도
쓸쓸하게 가지를 떠나는 낙엽 한 잎마저
어쩐지 기쁨에 겨워 춤추는 양 보이는
그런 때가

유정 편역의 일본현대 대표시선에서 쿠로다 사부로오의 시 '어느날 어느때' 전문. 전세 계약 기한은 다가오지만 어째 나갈 일은 멀기만 하여 이사 이후로 미뤄두었던 집안 정리와 재편을 감행하였다. 거실에 있던 TV와 홈시어터 시스템을 없애고(TV는 중고재활용센터에, 홈시어터 시스템은 동생에게 넘겼다) 어렸을 때부터 쓰던 책장에 새로 산 원목 책장 둘을 더해 거실 한쪽 벽면을 서가로 꾸몄으며 컴퓨터를 거실로 내오고 좌탁과 장식장 위에 놓을 책꽂이도 새로 구입하였다. 어지럽던 물건들과 작은방 둘도 말끔히 정리하였더니 새로 이사한 기분인 것이 진을 빼버려 이제 고대하던 이사 일정이 잡힌대도 옮길 엄두가 나지 않을 지경이다.

마루야마 겐지에 빠진 와중에 머리를 식히며 읽은 책 중 추천하는 한 권. 강명관의 '是非를 던지다'. 글 솜씨도 좋지만 따뜻한 심성과 시각이 좋아 더 정겹게 읽혔다. 읽는 내내 정민의 글과 비교가 되었다. 본문 중 이익의 붕당론에서 한 대목.

이제 열 사람이 꼭 같이 굶고 있다가 밥 한 그릇을 먹게 되었다고 해 보자. 그릇을 다 비우기 전에 싸움이 벌어진다. 물어보니, 말이 불손한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불손한 말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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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from text 2009/07/27 23:18
된통 한 방 먹은 기분이다. 싫은 건 싫고, 잡문을 잡스럽게 쓰거나 행동에서든 언사에서든 무슨 꼬투리라도 잡힐라치면 이후론 거들떠도 안 보곤 했었는데, 사실 이제는 그런 기억조차 잊고 먹고사는 일인데 다들 절로 이해도 되고 그렇게 헤아리는 것이 또 나이를 제대로 먹는 것도 같았는데, 스스로 꼬락서니가 우습기도 하고 가련키도 하다. 헛살기까지야 했겠냐 싶으면서도 무언가를 놓치고는 그 사실마저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니 더 늦기 전에 이렇게라도 떠밀린 것이 천만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소설가의 각오와 소설집 여름의 흐름을 읽고 든 생각이다. 되풀이 읽는 동안 이대로 살면 될까, 그래도 좋을까, 나중에도 괜찮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산문집을 먼저 읽어서인지(습관처럼 때때로 번갈아 읽어서인지) 데뷔작인 여름의 흐름 한 작품을 빼곤 산문에서의 얼굴이 내내 소설 속에 디밀어져 반갑고 무섭고 때로 참혹했다. 장편을 두어 권 골라 그의 세계에 더 오래 침잠할까 싶다.

소설가의 각오는 한참 전에 보고 놓아두었다 소설집을 읽으며 다시 꺼냈던 것인데 읽는 맛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억지스러움도 느끼고 닿지 못할 세계를 추구하는 아집도 느꼈던 것이 이번엔 치열한 정신과 굳건한 육신을 만나는 긴장과 즐거움을 한가득 느꼈으니 말이다. 소설에서는 무언가 제대로 벼린 느낌, 오래 잊고 있던 어떤 것(무거우나 매력적인 정서랄까, 시적 집요함이랄까, 잘 모르겠다)을 만난 느낌을 잔뜩 받았다. 따로 떼어 한 대목을 고를 수 없는 유형의 글들이라 소설에서도 몇몇 심장을 찌르는 대목을 옮기다 말고, 소설가의 각오에서 한 대목과 거기에 실린 인터뷰 중에서 한 대목만 옮긴다. 지나간 모든 것들은 지나간 자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지나간 자리만이 지나간 것들을 반추할 뿐이다. 어쩌면.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카드에 기대를 거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럴싸한 카드가 손에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열어본다. 흔해빠진 카드라도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슨 까닭에서인지 이 방법이 훨씬 강하다.

미시마 유키오가 마흔다섯 살 나이로 죽었을 때, 나는 아직 젊었죠. 그래서 이런 일도 마흔다섯 살이 되면 진력이 나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막상 마흔다섯 살이 되고 보니, 그 사람은 왜 겨우 마흔다섯에 포기하고 말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문학 자체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문학 주변에 떠도는 아지랑이 같은 것에 매력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런 결말을 맞이한 것이 아닐까 싶군요. 소설가의 재능이란, 소설 이외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요.

* 벼르던 올림푸스 E-P1은 예판 때 시간 맞춰 주문 넣었다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돌연 취소하고 말았다. 오늘 있은 500대 한정 판매 정발도 그냥 지나쳤다. 예판 주문 취소 후엔 짧은 후회도 있었지만 하도 달려들 드니 흥미도 애정도 반감되어 파나소닉 후속 기종이나 20mm 1.7 나올 때까지라도 미뤄둘 생각이다.

여름

from text 2009/06/26 13:22
바쁜 일과를 마친 아들의 손을 잡고 폭염특보가 내려진 거리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오후 여섯 시의 태양은 정면에서 바짝 얼굴을 겨눈다.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니 올 여름, 내 너를 상대해 주마. 사랑을 사랑으로 다스려 주마. 사람으로 사람을 잊고 거듭나는 이무기처럼 미끈한 몸뚱이를 날것으로 돌려주마.

나오자마자 사놓고 엊저녁에야 다 읽은 김규항의 예수전. 집요한 신앙고백 앞에 억지스러움을 넘어서는 숙연함을 느끼기도. 묵상에 대해 오래 묵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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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from text 2009/06/08 23:56
일요일 오후,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과 마더를 보았다. 터미네이터는 1, 2편의 신화를 제대로 계승하고 진화하여 새로운 시리즈의 서막으로 손색이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적절한 오마쥬로 지난 시리즈를 기리고 이야기를 완결함으로써 신화를 기억하는 이들을 위무하고 산뜻한 출발과 롱런을 기약하였다. 진정한 3편이자 1편.

제 허벅지에 침을 놓고 몸을 흔든다고 가슴의 응어리와 나쁜 기억을 떨칠 수야 없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마더가 아니라도 무언가를 위해 그렇게 몸부림친 경험이 있다. 그 기억이 새겨진 자리는 봄이면 새살이 돋다가도 잎이 지고 새가 울면 때맞춰 터지고 갈라진다. 경계하지 아니할 것을 경계하게 하고 경계할 것을 경계하지 아니하게 한다. 가꾸지 않으면 황폐하기 마련,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키지 않는다.

* 그보다 며칠 전엔 코렐라인 : 비밀의 문을 보았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서연이와 함께였는데 녀석이 이만큼 집중해서 영화를 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연방 무섭다면서 저도 나처럼 이 환상적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꼼짝없이 빨려들고 말았나 보다. 그 세계가 인상적이었던지 나중에 제 어미가 원작 코랄린을 사다 주었을 때에도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독파하는 걸 보았다. 유령신부, 크리스마스의 악몽과 함께 기억할 이름, 팀 버튼, 그리고 헨리 셀릭.

발자국

from text 2009/05/24 01:50
한 사나이가 갔다. 한 시대가 가듯 그렇게 갔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해 따라 날 저물 듯 스스로 걸어갔다. 공화국의 등짝에 선연한 발자국을 남기고 그렇게 갔다. 신동엽의 '散文詩 1'로 온종일 먹먹하던 가슴을 달래 본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 '담배 있나', 그게 사실이었든 아니든 그렇게 걸어간 마지막 길을 그보다 더 잘 상징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담배 한 대, 끝내 보류해 둔다마는 향 사르듯 사를 날을 또한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