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아까시 꽃 피는 2011/05/17
  2. 최후는 그렇게 2011/05/13
  3. Plants vs Zombies 2011/03/09
  4. 진광불휘 2011/03/03
  5. 우화 2011/01/29
  6. 마디마디 2010/12/24
  7. 1박 2일 2010/11/15
  8. 도랑물 소리 2010/11/11
  9. 바둑 2 2010/10/25
  10. 옛날 2010/10/16
  11. 꿈, 가을 2010/09/26
  12. 남자의 탄생 2010/08/18
  13. 모래언덕처럼 2010/08/12
  14. 누구든 2010/07/13
  15. 고슴도치 2010/06/22
  16. 2 2010/05/30

아까시 꽃 피는

from text 2011/05/17 06:16
작은 패배가 다른 패배를 부른다. 작은 패배들이 모여 큰 패배를 이룬다. 패배는 또한 승리를 부른다. 작은 패배들이 모여 큰 승리를 이룬다.

아이야,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것은 이따위 죽은 말들이 아니었다. 고작 그 작은 코에서 나는 코피를 닦아주고 휴지로 입구를 막아 그걸 멎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손길은 불 꺼진 어둠 속에서도 너를 선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마이너스 구 디옵터를 바라보는 도수로도 밝힐 수 없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사랑하는 아이야, 나는 네가 그 작은 승부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걸 보았다. 만회하고 뒤집히고 다시 뒤집는 걸 감전된 몸뚱이로 꼼짝없이 지켜보았다. 두 번의 긴 승부를 마치고 곧장 세 번째 승부를 가릴 때 나는 상기된 얼굴을 식히러 잠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낙관적이던 초반 형세는 그새 돌이킬 수 없는 형국이 되어 있었고, 내 마음은 회한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아이야, 내가 너를 만난 건 내가 나를 만난 것보다 오래 되었다.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너에게 사랑을 배우고 사랑의 실체를 알았다. 사랑하는 아이야, 내가 너를 안 건 네가 나를 안 것에 미치지 못한다. 애써 가여운 나를 위로하지 마라. 너를 내가 닮고 싶구나.

아까시 꽃 피는 더운 거리를 횡단하던, 너도 나도 누군지 모르는 시절이 문득 그립다, 사랑하는 작은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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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는 그렇게

from text 2011/05/13 12:26
사람이란 게 곧 죽어도 먹어야 할 땐 먹어야 하는 거다(먹다 보니 든 생각이고 그래서 정당한 얘기이지만, 뭐 그렇다고 먹어야 할 때 먹지 않는 놈이나 먹지 않아야 할 때 먹는 놈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야 할 때엔 가는 것이고 살아야 할 때에는 사는 것이다. 그게 정답이다. 곧 죽을 줄 알면서 먹는 것처럼 설령 그게 골로 가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최후는 그렇게 오는 것이고, 그래서 최후의 최후는 아름다운 것이다. 바둑돌 던지듯 그렇게 던지는 것이다. 돌을 거두듯 슬그머니 그렇게 목숨도 거두는 것이다. 암만.

Plants vs Zombies

from text 2011/03/09 22:33
서연이가 방과 후 컴퓨터 교실에서 받아온 '식물 대 좀비', 그야말로 재미있고 중독성이 강해 지난 명절 혼자 집에서 장난삼아 만졌다가 이틀 날밤을 꼴딱 새기도 하였다. 지혜의 나무를 1,000피트 이상 키우지는 못했지만, 거의 모든 과업을 완수한 듯. 두어 달 서연이와 나를 붙잡은 기념으로 기록을 남겨둔다.

* 지혜의 나무가 일러 주는 치트키는 future, mustache, tricked out, sukhbir, 그리고 daisies(100피트), dance(500피트), pinata(1,000피트). 이것 때문에 언젠가 1,000피트 넘게 키울지도 모르겠다.

진광불휘

from text 2011/03/03 16:40
잃어버린 걸 찾던 때가 있었다. 먼 미래의 어느 날처럼 아스라한 그때, 이미 나는 한번 죽었다. 지난겨울엔 많은 눈이 내렸고, 가슴에는 묻는 것이 많아졌다. 오래 추웠고 지칠 무렵 찾아온 온기가 문득 반가웠지만, 꽃샘추위는 동병상련인양 밉지 않았다. 진광불휘(眞光不輝) 네 글자를 며칠 붙들고 있다가 황지우를 다시 만났다. 그의 말처럼 어느 날 나는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흐린 주점에 앉아 먼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보게 될까. 그날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삼월은 삼월인가, 오늘은 낮부터 자꾸만 졸린다.

우화

from text 2011/01/29 11:57
하얀 눈썹을 휘날리며 토끼가 달렸어. 자기 굴 다섯 번째 입구를 머리 속에 떠올리고 말이야. 마음에는 다섯 개의 별을 그렸지. 세상의 비밀을 이제 슬쩍 엿보았을 뿐인데, 간밤에도 몇 차례 달이 지고 너구리 굴에 잠자던 낙엽은 하늘로 올랐지. 때가 된 건가, 눈밭을 헤치던 토끼는 아가위 붉은 열매도 지나치고 추상같은 전령도 지나쳤어. 까무룩 잠이 들었나, 술이 달더라니, 환약 같은 기억들을 검게 내지르고 토끼는 그예 길게 눕고 말았대.

새로 튼 둥지에서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도 철이고 멀어도 갈 길은 가야 하는 것을, 남은 생과 지나온 자국이 칼바람에 살갗을 에는 양 마냥 시리다. 세상엔 머지않아 다시, 봄이 오고 꽃이 필 테지. 사이나 먹은 붉은 열매 같은 것이 목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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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마디

from text 2010/12/24 21:29
매번 두려움에 떨면서도 폭음과 시체놀이를 번갈아 하다보니 얼굴도 어딘가 모르게 좀비를 닮아가고 있다. 어제는 모처럼 얼굴을 맞댄 대학 동기들 송년회 자리에서 꼬박 여섯 시간을 한자리에만 앉아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쓰린 속이 풀리면서 오랜 초조와 우울도 서서히 풀리는 것만 같았다. 거점과 지향에 대한 고민, 무시로 시공을 넘나들다 이차로 옮긴 자리에서 송아지의 한마디가 번갯불처럼 와 닿았다. 잊어버릴까 싶어 메모지를 얻어 적어두었다.

전선에 선 사람은 틀리게 마련이다. 마치 링 위에 오른 선수처럼.

그래, 이맘때를 기억해 두자. 돌이킬 수 없고 돌아오지 않을 빌어먹을 육 개월, 마디마디 깊숙이 새겨두자. 다음은 신석초의 바리춤 서사 첫 연.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 / 내 몸 언제나 꺾이지 않을 무구한 / 꽃이언만 / 깊은 절 속에 덧없이 시들어지느니 / 생각하면 갈갈이 찢어지는 내 맘 / 서러 어찌하리라.

1박 2일

from text 2010/11/15 20:04
어제, 그제 문경에 다녀왔다. 제5회 문경새재배 전국 아마바둑대회 대경초등 저학년부 참가를 이유로 서연이랑 둘이 떠난 여행이다. 대경초등부 경기는 일요일 오전에 시작하지만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하루 일찍 출발하였다. 좀 먼 길에는 기차만 고집하다보니 뜻하지 않은 일들도 생긴다. 몰랐는데 가는 기차는 네 량짜리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였다. 차량 내외는 온통 울긋불긋하였고, 무슨 이벤트 열차인가 한다고 경주에서 문경새재로 가는 아주머니와 애들이 바글바글하였다. 좀 있자니 각각의 연령에 맞춘답시고 남행열차부터 은하철도 999까지 아마추어 가수의 라이브 공연도 펼쳐졌다. 점촌역사는 아기자기하면서 여기저기 손댄 정성이 예뻐 보였다.

예약한 숙소 근처에서 한우 모듬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아마 최강부, 학생부 등 낮부터 열리는 대회를 둘러보았다. 부산의 천재로 알려진 초등학교 4학년생 신진서 군(올해 대한생명배 우승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대회뿐만 아니라 올해 열린 전국 초등학생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하였다고 한다. 전문학원에 다니지 않고 특별한 개인 지도 없이 독학으로 이룬 성과라고 하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대회에서는 아마 최강부에 출전하여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16강까지 올랐다)의 차분하고 또랑또랑한 얼굴과 서늘한 손매가 기억에 남는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고등학생 형을 열심히 응원한 서연이는 이날 현장에서 신청하여 이상훈 9단과 지도 다면기를 가지기도 하였다.

다음날 경기에서 서연이는 16강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대진 추첨 운도 따르지 않은 것이 상대는 작년에 준우승을 하고 이번에 같은 부에 출전하여 우승을 하였다). 올해 내가 함께한 경기로는 지난 4월 첫 우승한 대회의 예선전에서 한 번 진 후 첫 패배인데, 그날 우승하고 달려와 안긴 후 처음으로 달려와 안기기도 하였다. 습한 온기가 잔뜩 전해지면서 나는 그저 잘했어, 잘했어 다독이는 손에 힘만 들어갔다. 16강까지 감투상을 수여하여 상장과 부상으로 상금 3만원을 받았는데, 그동안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에 상금 넣는 걸 꽤나 즐기던 녀석이 오늘 아침 밥상머리에서는, 이번엔 아빠 하세요, 낮게 얘기하였다. 간밤에는 피곤하다며 그림일기 숙제도 하지 않고 저 먼저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잠이 들더니, 겉으로는 몰라도 저도 속은 안 좋았던 모양이다.

1박 2일 동안 영화를 네 편 보았다. 숙소에서 밤에는 원티드, 아침에는 터미네이터를 보았고, 차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역 근처 DVD방에서 내니맥피 2와 전우치를 달아서 보았다. DVD방에서는 유독 큰 소리로 깔깔대더니 나올 때는 양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까지 상상 속으로 자꾸만 날아다니던 녀석이 어째 애처롭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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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물 소리

from text 2010/11/11 11:05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다. 더는 핑계를 댈 수도 없다. 술이라도 끊어 볼 일이다. 그때 그 자리에 앉아 다른 생각만 하였다. 펄펄 날아다니던 것들은 그날 그것이 아니었다. 묵은 사진이 이야기하는 것이 묵은 시절에 대한 게 아닌 것처럼, 지나간 나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다. 낙엽은 재빨리 움츠리라는 명령,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대 목소리, 어린 체구가 하늘 건너듯 건넌 도랑물 소리보다 멀다.

바둑 2

from text 2010/10/25 19:19
어제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에서 열린 제28회 덕영배 아마대왕전 어린이 부문 예선 겸 2010 어린이 바둑 큰잔치에서 서연이가 1학년부 1위를 차지하며 이번 주 토요일 덕영치과병원에서 열리는 본선에 진출하였다. 8강이 겨루는 이번 본선에서 우승을 한다면 지난 4월 25일 대구광역시바둑협회 초등연맹장배 학생바둑대회를 시작으로 올해 대구에서 열리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것이다. 2학년부터는 우승을 하면 통상 상급 단증을 주니 내년에는 아마도 유단자부에서 자주 대회를 치를 터이다.

월간 바둑을 보다 보면 대구의 바둑 교육에 대해 아주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실상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거기 실린 자료로만 보자면 대구의 바둑교실 수는 타 시도에 비해 상당히 많은 편이나 방과후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는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온다. 서울은 65개교, 경기도는 112개교, 대전이 57개교, 부산이 46개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말이다. 한편으로 인천, 전라남도, 강원도가 각 2개교씩 운영하고 있어 별나게 유난을 떨 일은 아니겠지만 경상북도와 더불어 단 한 곳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건 어째 좀 씁쓸하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바람보다 잘 흔들리는 아비를 굳게 잡아준 두 아들에게는 미움보다 큰 빚을 졌다.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바다.

* 좀 전 셔츠를 다리다 주머니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종이 뭉치를 발견하였다. 부피를 보아도 그렇고 셔츠 주머니에 있은 걸로 봐도 그렇고 간단한 메모나 어디 술집 전표이거나 할 터인데 도통 기억이 없다. 기억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잠시나마 궁금하지도 않더니 문득 이렇게 늙어가나, 움켜쥘 어떤 것들도 그저 이렇게 가버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라디오에서는 엄마야 누나야, 오빠 생각이 경음악으로 구슬프게 흘러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음악에게도 많은 빚을 졌다. 아, 그리고 당신에게도. 물론 되갚을 생각은 없다. 누군가는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누군가는 그저 받아먹기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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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from text 2010/10/16 11:43
전시륜의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을 재미있게 읽었다. 늙어서 꼭 다시 펼쳐보아야지 하면서, 옛날에는 좋았겠다 그랬다. 전시륜보다 멋진 여자들이 넘쳤다. 스무 살 무렵 들은 선배들 이야기가 있다. 미팅이라도 할라치면 때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자리도 있는데 그럴 때면 상대가 자신이 벗어놓은 신발을 꼭 돌려놓아 주곤 했다는 얘기다. 그 세대는 그랬단다. 그게 통하는 예의였단다. 삼사년 된 일이지만,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자리에 같이 들어가던 이가 내 신발을 가지런히 돌려놓아 주거나 나란히 신발장에 넣어주던 일이 있었다. 그 손매가 마음만큼이나 예뻤다. 그 마음을 통째로 가질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한세상 살다가는 것이 무에 그리 잘나고 지랄난다고 속 쓰고 애태우는지 모를 일이다. 갈데없는 영혼들은 스스로 제 몸을 갈 데까지 밀고 가기도 한다. 찬 바람은 거짓말 같던 여름을 밀어내고 가뭇없이 가버린 것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렇게 주저앉아 울던 어떤 것들은 떨어져 꽃잎이 되기도 하였고, 가만히 토닥이는 손길에 놀라 달아나기도 하였다.

새벽 네 시, 돌아오는 길목들은 죄다 낯설었다. 내가 제 모습으로 세상을 보는지 세상이 비로소 제 모양을 드러내는지 알 길이 없었다. 오랜만에 가이아가 뒤척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풰스튀봘에게 경배를.

꿈, 가을

from text 2010/09/26 17:05
꿈을 꾸었다. 외딴 변기에 갇힌 꿈. 사타구니를 휘감아 흐르는 물뱀의 서늘함과 미끈함이 오랜 친구 같았다. 가을빛이 이리 시리건만 거기, 물 밖 꿈들은 대체로 안녕한지, 다시 피었다 지기도 하는지, 묻는 말에 거품만 부글거렸다. 대답할 길이 없었다.

가을이다. 결코 정을 나눌 생각은 없지만 최악의 인간상에 어느 정도 적응도 되었고 반면교사로 삼을 수도 있게 되었다. 수확이라면 이른 수확이다. 피폐한 중에 최성각의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를 읽고 몇 권의 책을 주문하였으며, 마루 밑 아리에티, 슈퍼 배드, 무적자, 해결사 등을 보았다. 사진이야 찍거나 말거나 작고 예쁜 디지털 바디가 소원이더니 후지필름이 포토키나 2010에서 발표한 파인픽스 X100 때문에 모처럼 가슴 두근거리며 갖고 싶은 것이 생겼다. 내년 3월은 되어야 출시될 모양이니 그전에 나올 여러 모델들과 비교하며 기다리는 재미도 쏠쏠하겠다. 여전히 사는 건 녹록치 않고 간밤 꿈에 낮으로 시달리기도 하지만, 가을빛을 보니, 세상은 참으로 지내볼 만한 것이 아닌가,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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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

from text 2010/08/18 21:39
비가 달라졌다. 기후가 바뀐 것이든(TV, 에어컨, 차 없이 잘(?) 살고 있으나 이참에 에어컨은 장만할 생각이다. 올해도 여러 번 망설이다 그냥 지나가지만 내년에 다시 오락가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적어둔다) 원래 그런 것이었든 지금껏 알고 좋아하던 그 비는 아닌 게 분명하다. 가벼운 인두염인 줄 알았더니 며칠째 열이 내리지 않아 소아병원에 입원한 서율이를 두고 집으로 오던 길, 우산을 들고도 시장 네거리 마트 앞에 서서 비를 피하며 그 생각을 하였다. 늦은 밤, 저녁을 굶은 속에 들이키는 깡통 맥주는 저 혼자 출렁거렸고 포도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길대로 흐르기를 거부하였다. 모퉁이를 돌아 늙은 고양이 한 마리가 제멋대로 내달렸다.

지난 일요일 서연이와 오션스를 보았을 때, 그게 다 존재가 외롭고 슬퍼서 그런 거라 했었다. 바다 생물들이 떼를 지어 어떤 형상을 만들고 무리지어 내달리거나 거대한 몸체를 솟구치며 무언가를 증명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술을 먹고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거나 어두운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몰래 울음을 토해내는 모습을 닮아 있다. 그렇게 취하고 소리 지르며 울거나 알아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 거기 있는 것이다. 스크린 너머, 짐승의 젖은 눈망울 속에는 비리고 날 선 우리의 욕망과 거울처럼 까맣게 타들어가는 또 다른 초상이 교차하고 있었다.

몽골 여행 전후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을 읽었다. 진작 이 흥미롭고 감미로운 책을 제목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게 한스러울 정도였다.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를 읽다 발견하고 할끔할끔 핥아 읽었다. 무엇이든 탐독하던 한때처럼 밑줄 그을 일이 많았다. 다 밑줄을 칠 순 없는 노릇이라 아껴가며 읽는 맛이 더했다. 이 사유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자유를 들먹이는 것은 얼마나 가소로운 일일 것인가. 자라온 지난날과 그에 비추어 앞날을 반추하는 것보다 자라나는 아이에게 오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가 스스로와 세상을 더 끔찍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모래언덕처럼

from text 2010/08/12 18:13
지난주 월요일, 몽골에서 돌아온 날 저녁, 사무실 회식을 시작으로 수요일과 금요일 늦게까지 많은 술을 마셨고, 어제, 그제, 그끄제 내리 사흘 또 피할 수 없는 술자리를 가졌다. 고비 사막에서의 첫날, 몽골인 가이드 어기의 재담과 몽골 사람들의 유목민풍 노래에 취하고 급작스레 쏟아지는 빗줄기와 몽골 보드카에 취한 이후 넓거나 깊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 돌아온 게 이제야 납득이 되고 실감이 간다. 사람은 얼마나 관대할 수 있고 어디까지 추할 수 있을까. 울림 큰 가락을 타고 언제 뜨거웠냐는 듯 곳곳에서 식은 바람이 모여드는데 나는 홀로 모래언덕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세상엔 하현을 향하는 달만 멀쩡하였고, 눈이 마주치자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음은 이광구가 엮은 조훈현과의 대화에서 조훈현.

편한 대로 이해하세요. 그러나 일상적인 의미에서 착하다는 것과 승부에서 마음이 여리다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착한 사람은 승부끼가 없고 나쁜 사람이라야 승부에 강하다는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착한 사람이 승부에서는 더 지독해지고 더 처절한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건 제 생각은 아니고 저도 어디선가 읽은 얘기인데, 저도 잘 모르는 얘기를 하자니 좀 쑥스럽습니다만, 승부는 말하자면 결단의 연속인데, 결단이란 요컨대 '선의의 의지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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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from text 2010/07/13 02:07
나는 살겠다 말하거라. 혹시 죽게 되어도 그것이 내 뜻이 아니라 말하거라. 허니 편안하게 가시라 말씀드려라. 내게 그분을 살릴 힘이 없으니 그것이 한이다 말씀드려라. 그러나 내가 이제 세상을 알았다 또한 말씀드려라. 저들이 저들의 죄로 살고 죽는 것을 내가 두 눈 뜨고 다 보리라 말씀드려라.

그리되기 어려울 것이나 혹시 그럴 길이 있다면…… 무엇을 팔아서라도 목숨을 구하시라 전하거라. 그것이 내가 서찰에 쓰고자 했던 말이었음을…… 네가 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잊지 말거라. 그러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오직 한마디뿐이다. 좋은 세상에서 만났다면, 나 또한 이런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내가 그저 물 흐르는 마음으로만 살았으리라…….

김인숙의 소현 중에서, 어쩌면 책의 전체 맥락에서 가장 동떨어진 한 대목. 첫 장부터 읽는 내내 김훈이 자꾸만 떠올랐으나, 문장과 그 문장이 이룬 세계에 쭈욱 빨려들고 말았다. 갑작스런 인사이동으로 터가 바뀐 탓에 어울리잖게 영 짬이 안 나고 여유가 없더니 조금씩 숨통이 트이는가, 쓸 말은 없으되 모처럼 늦은 밤에 마주하는 자판이 정겹다. 언제 그랬던가. 칠월의 밤이 좋고 가벼운 빗밑이 좋다. 그래, 가벼울 나이도 되었지. 누구든 어린 날은 충분히 무거웠고 지난날은 돌이킬 수 없으니.

고슴도치

from text 2010/06/22 16:51
또래보다 덩치는 배로 큰 데다 갈수록 고집도 생기고 저지레가 늘어 그간 봐주시던 어머니의 힘이 부쳐 결국 두 살배기 서율이 녀석이 지난 17일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나마 멀지 않은 곳에 믿음직한 어린이집이 있어 다행이다. 이곳에서는 하루 일과가 끝나면 그날의 프로그램을 각각의 동영상으로 만들어 홈페이지에 올려놓는데, 보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보다 보면 그저 벙싯벙싯 웃기도 하고 마음이 짠해 무언가 사무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첫날, 잘 적응하는지 궁금해 전화를 한 0124님에게 보육교사는 이렇게 말했단다. 처음 잠깐 울먹이더니 잘 적응하고 있다, 참 점잖다, 수업 태도도 좋고 집중력이 뛰어나다. 점잖다는 거야 곧 실체를 알게 될 터이고, 수업 태도며 집중력이라니 헛웃음이 나오며 어이가 없었지만, 동영상을 보고서는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서연이를 그리 보았건만 이놈의 고슴도치는 반성할 줄을 모른다.

* 이게 없으면 못 살 것 같고 저게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은 것들도 지나고 나면 다 그저 지나가 버린다. 그리고 살아간다. 애써 찾지도 않는다. 모처럼 재미있게 읽은 책 하나.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 상식인의 훌륭한 전거를 제대로 마련해 주었다. 스스로 너나 네 정신머리는 이미 늙어버린 건 아닌지 때때로 물어볼 일이다. 아무렴.

from text 2010/05/30 01:08
보라, 결국 계절은 제자리를 찾았다. 잦은 바람에도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누가 뭐래도 세상은 아랑곳없다. 별 탈도 뒤탈도 없다. 흥미로운 일도 새삼스러울 일도 없다. 그렇게, 건조한 미라의 가슴을 안고 이창동의 시를 보았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추리소설 몇 편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죄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펄펄 끓던 시절, 나에게도 앤톨리니 같은 선생이 있었거나 그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였다. 그뿐이었다). 직장에서는 어쨌든 10년 근속상을 받았고, 이날과 몇몇 핑계거리가 있는 날엔 많은 술을 마셨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다가 그게 무언지 몰라 주춤거렸으며 버릇대로 일찍 취해갔다. 달라진 게 있다면 부끄러움이 많아졌다는 것이고 저녁으로 한두 시간씩 서연이의 바둑을 보는 게 낙이라면 낙이다. 닭 모가지를 베고 자는지 잠도 꿈도 짧아졌고 무기력함과 건망만 늘었다. 젠장, 길이 있는데 길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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