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2건

  1. 알레르기 2 2012/10/26
  2. 146mm 2012/08/23
  3. 직녀에게 2012/08/14
  4. 풍문 4 2012/07/11
  5. 별똥 떨어지듯 2 2012/05/14
  6. 될동말동 2011/08/25
  7. 달중이 2011/08/09
  8. 달범이 2011/08/08
  9. 가늠해보건대 2011/07/28
  10. 아까시 꽃 피는 2011/05/17
  11. 최후는 그렇게 2011/05/13
  12. Plants vs Zombies 2011/03/09
  13. 진광불휘 2011/03/03
  14. 우화 2011/01/29
  15. 마디마디 2010/12/24
  16. 1박 2일 2010/11/15

알레르기

from text 2012/10/26 15:29
인간만큼 비린 생물이 있을까. 그 비루함. 서로를 어르는 짧은 순간에도 그것은 새끼를 치고 자란다. 한때 사랑이 사랑인 줄 알았다. 어제는 지나간 한 해 한 해를 복기해 보았다. 이리 놓고도 저리 놓고도 스무 몇 수에서 막힌 수순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수순은 엉켰으되 반상의 절반을 메운 돌들은 남은 수순을 강제할 것이다. 가을, 타고 흔한 것들이 마른 볕에 제멋대로 나부낀다. 봄이 그리운가. 비린내가 구린내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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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mm

from text 2012/08/23 18:42
나는 술을 따를 때 <그만> 하고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오. 술을 충분히 마시지 않겠다는 건 술을 마시면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뜻 아니겠소?

나는 입이 무거운 사람을 믿지 않소. 그런 사람들은 대개 가만히 있다가 엉뚱한 시기에 엉뚱한 말을 하는 법이오. 말이란 것은 계속 사용하지 않고는 현명하게 쓰기가 어려운 것이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에서 새뮤얼 스페이드와 대화 중 캐스퍼 거트먼의 말. 집 앞 네거리, 쏟아지는 비에 신호를 기다리다 말고 한 처마 밑으로 들어가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잠시 출근을 잊고 싶었나, 길을 잃고 싶었나 모르겠다. 차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잘도 달리고, 사람들은 역전의 용사처럼 보였다. 조금 있자니 그 비에 둘째 녀석은 제 어미의 손을 잡고 신이 나 길을 건너고, 나는 그만 무언가를 슬쩍 빗물에 흘리고는 바짓가랑이에 비를 담고 멀리 걷기 시작하였다. 사는 게 시시해져 버렸다.

직녀에게

from text 2012/08/14 15:06
병영집체교육이란 게 있었다. 1988년 늦은 봄이었을 게다. 어느 밤, 동기생 한 명이 뭔가에 잘못 걸려 내무반장의 지시로 원산폭격을 하게 되었고 그 상태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가 부른 건 막 우리들 사이에 유행을 타기 시작하던 '직녀에게'였다. 곡조도 가사도 부르는 이의 음색과 제대로 맞아떨어져 내무반은 일순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고, 내무반장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사태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아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은하수 건너
오작교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 딛고 다시 만날 우리들
연인아 연인아 이별은 끝나야 한다 슬픔은 끝나야 한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어쩌다 한가인의 소주 광고를 보았다. 그립던 이미지와, 꼭 한 번 해보고 싶다던 게 떠올랐다. 밤새 얘기며 술이나 노래를 나누는. 철마다 한 번쯤 볼 수 있다면 좋았을까. 아니 좋은 계절을 정해 한두 해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장악하지 못한 채 사태는 흘러간다. 맡길 뿐이다.

풍문

from text 2012/07/11 17:15
더위가 결정되었다. 소식을 들은 아내는 존재와 무를 덮고 소리없이 웃는다. 어느 저녁, 무심한 영혼은 정갈히 손톱을 다듬고 술을 마시러 나간다. 짐승이 사냥에 나서기 전에 발톱을 갈듯 잘 갈무리한 손톱을 전장에 내어놓는 것이다. 분지는 습도로 충만하고 술잔에는 저마다 가속도가 붙는다. 서로 침범하던 무리 일부는 상대의 영역에서 소리내어 운다. 풍문은 풍문에 그치고, 어떤 가슴은 그 자리에 거꾸러진다.

유월, 다시 둥지를 틀었다. 낯익은 곳이면서 낯설다. 장마 한가운데 모처럼 자판을 마주하고 있자니 묵은 것들이 눅눅하게 올라온다. 사무실 바닥에는 며칠 슬픈 가락처럼 검정왕개미가 잔뜩 출몰하였다.

별똥 떨어지듯

from text 2012/05/14 17:45
무엇이 그렇게 바빴나 모르겠다. 무엇이 이렇게 몰아붙였는지 모르겠다. 틈이 나면 민들레 달인 데 의지해 쫓기듯 술을 먹고는 제정신을 잊고 살았다. 얼굴은 밤하늘처럼 검게 쪼그라들었고 자라는 거라곤 미리 자리잡은 검버섯 밖에 없었다. 별똥 떨어지듯, 물론, 한 번뿐이다. 그렇다고 어느 곳에선가 다시 태어나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처럼 지금 생을 보내는 걸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룻저녁 평생을 살 듯 마셔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똥무더기에 냅다 몸을 던져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8일에는 엄청난 우박을 보았다. 용천사 쪽에서 오르는 비슬산 중턱 토담마을에서였다. 한여름 소나기처럼, 폭죽처럼 손가락 마디만한 우박들이 쏟아졌다. 산이 조난되고 곧장 다른 세상이 닥칠 것만 같았다.

근자에, 저나 나나 지루한 세태에 식물 대 좀비처럼 버닝한 건 스머프 빌리지와 타이니 팜이다. 타이니 팜에 관심이 더해가면서 잘 가꾸지 못한다는 이유로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스머프 빌리지를 지운 서연이는 한참을 울고 말았다고 한다(시든 작물을 보고 녀석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해를 넘겨 같이 꾸미던 것을 지운 마음은 어떤 것일까). 혼자 버닝 중인 건 다음 연재 웹툰 미생이다. 허영만 이후 만화를 이렇게 열심히 보게 될 줄 몰랐다.

다음은 그간 기록 못한 서연이의 대회 참가 일지.

12월 11일, 서구청소년수련관, 서구청소년수련관 개관 10주년 기념 청소년 바둑대회 유단자부 4강
12월 18일, 덕영치과병원, 제29회 덕영배 아마대왕전 어린이 부문 유단자부 우승
12월 30일, 서울 K-바둑 스튜디오, 제1회 K-바둑배 어린이 최강전 최강부 첫 경기 탈락
4월 15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180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6조 16위(2승 3패)

될동말동

from text 2011/08/25 14:37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인과 조세래의 승부를 인터넷 헌책방에서 구해 읽었다. 설국이 아니라 명인을 대표작으로 꼽는 이들이 있다던데 백번 공감이다. 승부는 완독한 거의 최초의 무협소설이랄까 대중소설이랄까, 덕분에 며칠 재미있게 보냈다. 완간되지는 않았지만 호타 유미 글, 오바타 타케시 그림의 히카루의 바둑도 재미있게 읽었다. 다 바둑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그전에 읽은 것으로는 윤구병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와 흙을 밟으며 살다, 김진숙의 소금꽃나무, 재닛 에바노비치의 원 포 더 머니가 기억에 남는다. 이대로 살 수 없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건 아닌가 간혹 돌아보게 된다. 이대로 잘 살 수 있도록 몰아도 될동말동한데 말이다. 이른 가을에다 늘 흐리고 비가 오니 내 세상을 만난 듯 새 세상을 본 듯 힘이 솟기도 한다. 며칠 전 술을 마시러 간 들안길 한 모퉁이(도레미, 그때 생각이 문득 났더랬다)에서는 동쪽 하늘을 온통 가르는 큰 무지개를 보았다. 미리 앉아 있던 사람을 끌어내 무지개를 보여주었고, 함께 술집으로 돌아왔다. 전작이 있었는지 무지개는 일찍 곯아떨어졌고, 어디에 있었더라, 내 몸에서는 짙은 무엇이 빠져나갔다.

달중이

from text 2011/08/09 11:33
별일이 다 있다. 엊저녁 서연이랑 배드민턴을 치고 들어오는 길에 달범이를 만난 자리 부근에서 똑같은 종류의 달팽이를 본 것이다. 덩치가 약간 더 큰 이 녀석은 그간 먹을 게 마땅찮았는지 레종 담뱃갑을 물어뜯고 있었다. 안 됐기도 하고 망설이다가 서연이에게, 아빠는 한 마리 더 키울 생각이 없다, 다만 네가 꼭 키우겠다면 네가 들고 들어가자, 그러면 번식은 않는 걸로 하고 한번 키워보겠다 했더니,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마음을 내어 냉큼 들고 오는 게 아닌가. 안 그래도 데려왔을 터이지만 꼼짝없이 짝을 지어줄 핑계가 생긴 것이다. 달걀껍질 부순 것에다가 상추, 배추를 한 장씩 넣어주었더니 잘 먹고 원기를 회복한 듯, 아침에 보니 잔뜩 움츠리던 어제와 달리 손길에 큰 거부감이 없다. 서연이에게 이번에도 이름을 지어주라 했더니 대뜸 달중이란다. 높지도 말고 낮지도 말고 중간으로 하라는 말이라니, 녀석, 어느 책 어느 대목에서 그 비슷한 걸 읽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감도 그렇고 딱 좋다. 녀석은 오늘부터 3박 4일 서울, 분당으로 바둑대회 참석 겸 견학 겸 다녀온다. 어미아비와 떨어져 처음으로 긴 시간을 보내는 것, 견문도 넓히고 속도 채우는 시간이 되기를. 잘 다녀오려무나.

* 오늘(8월 10일) 63빌딩 별관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제11회 대한생명배 세계어린이국수전, 녀석은 저학년부에 출전하여 4강을 차지하였다. 예선은 통과하겠지, 그것도 대진 운이 따라야 할 텐데, 4강까지는 갔으면 좋겠는데, 했던 것이 승전보를 전해 올 때마다 욕심이 늘어, 결과가 나오고 나니 처음 바람은 잊고 졸였던 마음만큼이나 많이 아쉬웠다. 비록 학년부이지만 전국에서 모인 64명이 겨룬 본선, 잘했다, 반상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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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범이

from text 2011/08/08 09:45
며칠 전 저녁 무렵 담배나 한 대 태우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입구 화단에서 큰 달팽이 한 마리를 만났다. 늘 보았던 달팽이와 달리 몸집이 워낙 커서 처음에는 무슨 괴물을 보는 기분이었는데, 애들이 좋아할 것 같아 징그러움을 무릅쓰고 달랑 들어 집으로 데려왔다. 컴퓨터를 켜고 이리저리 찾아보니 짐작대로 애완용으로 많이 키운다는 식용 달팽이였다. 아마도 누군가 키우다가 비 오는 날 내놓은 것이겠지. 부랴부랴 집을 장만하고 채소도 사서 넣어주었더니 애들도 좋아하고 저도 잘 적응하는 것 같다. 식성이 좋아 하루저녁에 상추 큰 것 한 장 정도는 먹어치운다. 서연이는 한 마리 더 사서 알도 낳고 부화도 해 보자는데 보통 번거로울 일이 아니다 싶어 말렸다. 외로울 일이야 무엇 있으랴. 천성대로 느릿느릿 잠자고 꿈꿀 일이다. 서연이가 지어준 녀석의 이름은 달범이다. 아범, 할아범 하듯이 달범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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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늠해보건대

from text 2011/07/28 07:18
매미는 몇 년을 땅 속에서 번데기로 살다가 성숙한 매미로 변신하여서는 고작 며칠을 산 뒤 교접하고 알을 낳고 죽는다고 한다. 찬란하거나 허무한 일생으로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이고 공감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매미를 대단하게 여기고 번데기로 사는 기간을 얕잡아보는 데서 오는 것일 뿐, 그 일생을 뉘라서 알 수 있겠나.

의도적으로 자의식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람만이 비평이든 예술이든 할 수 있을 터이다. 부족한 자의식을 부러 끌어올려서는 될 일도 안 되고 말고.

역사가 알려주는 바, 땅을 가진 농사꾼은 전쟁이나 혁명에 몸을 던지려 하지 않는단다(한겨레21 863호, 이제훈). 쥐뿔 가진 것도 없으면서 꽤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말이다. 다만 현대인이 저마다 가진 병리학들은 동시대 인간의 행동에 대한 어떠한 예측도 가소롭게 만들고 만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다음은 윤구병의 흙을 밟으며 살다에서 한 대목.

현대인아, 너는 왜 뛰면서 생각하느냐? 어느 주인이 너를 그렇게 몰아대느냐? 어떤 무서운 괴물이 네 뒤를 쫓고 있느냐? 너는 바로 멸망을 향해서 뛰고, 죽음을 향해서 뛰는 것이 아니냐? 어차피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면, 게으르게 건들거리면서 그 문턱에 가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 때 아닌 씨앗을 뿌려 쭉정이만 있는 낟알을 거두는 것보다 때에 맞는 씨를 뿌려 영근 낟알을 거두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현대인아, 밤이다. 부지런 그만 피우고, 우리 풀숲에 누워 별을 헤아리자. 그리고 올빼미가 깃을 펴기를 기다리자.

* 5월부터 바둑을 다시 시작한 서연이의 그간 대회 참가 성적을 기록해 둔다. 산다는 게 바둑돌만큼이나 착점할 자리는 많겠지만 제대로 길을 찾기란 그래서 또 얼마나 어려울 것이냐. 아비를 붙들어 매는 것만 해도 수를 내고 있는 것이려니, 이번에도 아비는 기분 좋게 지고 말았구나.

5월 15일, 영남이공대학 천마체육관, 제3회 대구시장배 전국 바둑대회 2학년부 4강
5월 29일, 경주 위덕대학교 체육관, 제1회 위덕대학교 총장배 학생 바둑대회 2학년부 우승
7월 23일, 포항 실내체육관, 제3회 영일만사랑배 전국 바둑대회 2학년부 우승
7월 24일, 계명대학교 바우어관, 제11회 대한생명배 세계어린이국수전 대구지역 예선 저학년부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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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시 꽃 피는

from text 2011/05/17 06:16
작은 패배가 다른 패배를 부른다. 작은 패배들이 모여 큰 패배를 이룬다. 패배는 또한 승리를 부른다. 작은 패배들이 모여 큰 승리를 이룬다.

아이야,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것은 이따위 죽은 말들이 아니었다. 고작 그 작은 코에서 나는 코피를 닦아주고 휴지로 입구를 막아 그걸 멎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손길은 불 꺼진 어둠 속에서도 너를 선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마이너스 구 디옵터를 바라보는 도수로도 밝힐 수 없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사랑하는 아이야, 나는 네가 그 작은 승부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걸 보았다. 만회하고 뒤집히고 다시 뒤집는 걸 감전된 몸뚱이로 꼼짝없이 지켜보았다. 두 번의 긴 승부를 마치고 곧장 세 번째 승부를 가릴 때 나는 상기된 얼굴을 식히러 잠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낙관적이던 초반 형세는 그새 돌이킬 수 없는 형국이 되어 있었고, 내 마음은 회한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아이야, 내가 너를 만난 건 내가 나를 만난 것보다 오래 되었다.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너에게 사랑을 배우고 사랑의 실체를 알았다. 사랑하는 아이야, 내가 너를 안 건 네가 나를 안 것에 미치지 못한다. 애써 가여운 나를 위로하지 마라. 너를 내가 닮고 싶구나.

아까시 꽃 피는 더운 거리를 횡단하던, 너도 나도 누군지 모르는 시절이 문득 그립다, 사랑하는 작은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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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는 그렇게

from text 2011/05/13 12:26
사람이란 게 곧 죽어도 먹어야 할 땐 먹어야 하는 거다(먹다 보니 든 생각이고 그래서 정당한 얘기이지만, 뭐 그렇다고 먹어야 할 때 먹지 않는 놈이나 먹지 않아야 할 때 먹는 놈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야 할 때엔 가는 것이고 살아야 할 때에는 사는 것이다. 그게 정답이다. 곧 죽을 줄 알면서 먹는 것처럼 설령 그게 골로 가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최후는 그렇게 오는 것이고, 그래서 최후의 최후는 아름다운 것이다. 바둑돌 던지듯 그렇게 던지는 것이다. 돌을 거두듯 슬그머니 그렇게 목숨도 거두는 것이다. 암만.

Plants vs Zombies

from text 2011/03/09 22:33
서연이가 방과 후 컴퓨터 교실에서 받아온 '식물 대 좀비', 그야말로 재미있고 중독성이 강해 지난 명절 혼자 집에서 장난삼아 만졌다가 이틀 날밤을 꼴딱 새기도 하였다. 지혜의 나무를 1,000피트 이상 키우지는 못했지만, 거의 모든 과업을 완수한 듯. 두어 달 서연이와 나를 붙잡은 기념으로 기록을 남겨둔다.

* 지혜의 나무가 일러 주는 치트키는 future, mustache, tricked out, sukhbir, 그리고 daisies(100피트), dance(500피트), pinata(1,000피트). 이것 때문에 언젠가 1,000피트 넘게 키울지도 모르겠다.

진광불휘

from text 2011/03/03 16:40
잃어버린 걸 찾던 때가 있었다. 먼 미래의 어느 날처럼 아스라한 그때, 이미 나는 한번 죽었다. 지난겨울엔 많은 눈이 내렸고, 가슴에는 묻는 것이 많아졌다. 오래 추웠고 지칠 무렵 찾아온 온기가 문득 반가웠지만, 꽃샘추위는 동병상련인양 밉지 않았다. 진광불휘(眞光不輝) 네 글자를 며칠 붙들고 있다가 황지우를 다시 만났다. 그의 말처럼 어느 날 나는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흐린 주점에 앉아 먼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보게 될까. 그날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삼월은 삼월인가, 오늘은 낮부터 자꾸만 졸린다.

우화

from text 2011/01/29 11:57
하얀 눈썹을 휘날리며 토끼가 달렸어. 자기 굴 다섯 번째 입구를 머리 속에 떠올리고 말이야. 마음에는 다섯 개의 별을 그렸지. 세상의 비밀을 이제 슬쩍 엿보았을 뿐인데, 간밤에도 몇 차례 달이 지고 너구리 굴에 잠자던 낙엽은 하늘로 올랐지. 때가 된 건가, 눈밭을 헤치던 토끼는 아가위 붉은 열매도 지나치고 추상같은 전령도 지나쳤어. 까무룩 잠이 들었나, 술이 달더라니, 환약 같은 기억들을 검게 내지르고 토끼는 그예 길게 눕고 말았대.

새로 튼 둥지에서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도 철이고 멀어도 갈 길은 가야 하는 것을, 남은 생과 지나온 자국이 칼바람에 살갗을 에는 양 마냥 시리다. 세상엔 머지않아 다시, 봄이 오고 꽃이 필 테지. 사이나 먹은 붉은 열매 같은 것이 목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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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마디

from text 2010/12/24 21:29
매번 두려움에 떨면서도 폭음과 시체놀이를 번갈아 하다보니 얼굴도 어딘가 모르게 좀비를 닮아가고 있다. 어제는 모처럼 얼굴을 맞댄 대학 동기들 송년회 자리에서 꼬박 여섯 시간을 한자리에만 앉아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쓰린 속이 풀리면서 오랜 초조와 우울도 서서히 풀리는 것만 같았다. 거점과 지향에 대한 고민, 무시로 시공을 넘나들다 이차로 옮긴 자리에서 송아지의 한마디가 번갯불처럼 와 닿았다. 잊어버릴까 싶어 메모지를 얻어 적어두었다.

전선에 선 사람은 틀리게 마련이다. 마치 링 위에 오른 선수처럼.

그래, 이맘때를 기억해 두자. 돌이킬 수 없고 돌아오지 않을 빌어먹을 육 개월, 마디마디 깊숙이 새겨두자. 다음은 신석초의 바리춤 서사 첫 연.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 / 내 몸 언제나 꺾이지 않을 무구한 / 꽃이언만 / 깊은 절 속에 덧없이 시들어지느니 / 생각하면 갈갈이 찢어지는 내 맘 / 서러 어찌하리라.

1박 2일

from text 2010/11/15 20:04
어제, 그제 문경에 다녀왔다. 제5회 문경새재배 전국 아마바둑대회 대경초등 저학년부 참가를 이유로 서연이랑 둘이 떠난 여행이다. 대경초등부 경기는 일요일 오전에 시작하지만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하루 일찍 출발하였다. 좀 먼 길에는 기차만 고집하다보니 뜻하지 않은 일들도 생긴다. 몰랐는데 가는 기차는 네 량짜리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였다. 차량 내외는 온통 울긋불긋하였고, 무슨 이벤트 열차인가 한다고 경주에서 문경새재로 가는 아주머니와 애들이 바글바글하였다. 좀 있자니 각각의 연령에 맞춘답시고 남행열차부터 은하철도 999까지 아마추어 가수의 라이브 공연도 펼쳐졌다. 점촌역사는 아기자기하면서 여기저기 손댄 정성이 예뻐 보였다.

예약한 숙소 근처에서 한우 모듬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아마 최강부, 학생부 등 낮부터 열리는 대회를 둘러보았다. 부산의 천재로 알려진 초등학교 4학년생 신진서 군(올해 대한생명배 우승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대회뿐만 아니라 올해 열린 전국 초등학생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하였다고 한다. 전문학원에 다니지 않고 특별한 개인 지도 없이 독학으로 이룬 성과라고 하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대회에서는 아마 최강부에 출전하여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16강까지 올랐다)의 차분하고 또랑또랑한 얼굴과 서늘한 손매가 기억에 남는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고등학생 형을 열심히 응원한 서연이는 이날 현장에서 신청하여 이상훈 9단과 지도 다면기를 가지기도 하였다.

다음날 경기에서 서연이는 16강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대진 추첨 운도 따르지 않은 것이 상대는 작년에 준우승을 하고 이번에 같은 부에 출전하여 우승을 하였다). 올해 내가 함께한 경기로는 지난 4월 첫 우승한 대회의 예선전에서 한 번 진 후 첫 패배인데, 그날 우승하고 달려와 안긴 후 처음으로 달려와 안기기도 하였다. 습한 온기가 잔뜩 전해지면서 나는 그저 잘했어, 잘했어 다독이는 손에 힘만 들어갔다. 16강까지 감투상을 수여하여 상장과 부상으로 상금 3만원을 받았는데, 그동안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에 상금 넣는 걸 꽤나 즐기던 녀석이 오늘 아침 밥상머리에서는, 이번엔 아빠 하세요, 낮게 얘기하였다. 간밤에는 피곤하다며 그림일기 숙제도 하지 않고 저 먼저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잠이 들더니, 겉으로는 몰라도 저도 속은 안 좋았던 모양이다.

1박 2일 동안 영화를 네 편 보았다. 숙소에서 밤에는 원티드, 아침에는 터미네이터를 보았고, 차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역 근처 DVD방에서 내니맥피 2와 전우치를 달아서 보았다. DVD방에서는 유독 큰 소리로 깔깔대더니 나올 때는 양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까지 상상 속으로 자꾸만 날아다니던 녀석이 어째 애처롭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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