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75건

  1. 2009/05/09
  2. 오월 2009/05/04
  3. 오후 여섯 시 2009/04/28
  4. 조우 2009/04/27
  5. 봄날 2009/04/14
  6. 사랑니 2009/03/29
  7. 밀명 2009/03/18
  8. 슈퍼마리오 2009/03/16
  9. 봄, 그러나 2009/03/10
  10. Old Partner 2009/02/16
  11. 전시 2009/01/21
  12. 사계 3 2009/01/20
  13. 꿈 2 2009/01/11
  14. 사계 2 2009/01/10
  15. nylon night 2009/01/01
  16. 지렁이 소고 2008/12/27

from text 2009/05/09 23:47
어제오늘 통영에서 뱃길 사십오 분 거리의 욕지도에 다녀왔다. 기억 속의 남해섬에 비길 바는 아니었으나 고즈넉하고 예쁜 섬이었다. 풍경을 잘 찍지 않는데다 일행(나까지 노소 남자 일곱 명)을 담을 일은 더욱 없겠다 싶어 귀찮은 마음에 사진기를 챙기지 않았는데 막상 담고 싶은 풍광이 많아 아쉬웠다.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을 맞으며 선상에서 바라본 남해 바다는 점점이 박힌 섬들까지 그대로 담백한 수묵화였다. 섬은 황토색 비탈밭과 색색깔 지붕을 인 낮은 집들이 짙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곱기 이를 데 없었으나 관광버스와 사람들, 이국적인 펜션들로 어지럽기도 했다.

숙소 주변에서는 모처럼 바닷가 낙조를 즐길 수 있었다. 내 속 어딘가도 새빨간 자국을 남기고 해가 지자마자 건너편엔 하얗게 달이 떴는데, 아침이면 저기서 다시 붉은 덩어리가 떠오르겠거니 했다. 시뻘건 초고추장에 날것 그대로의 앙상한 욕망을 나눈, 저마다의 봄밤, 보름을 하루 앞둔 달이 하도 밝아 별은 보이지 않는데 바다에 부서진 달빛은 천 갈래 만 갈래 제가끔 먼 곳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돌아올 때 보니 육지도 너도 하나의 섬이더라. 곱고 어지러운 하나의 파멸이더라.

헤아려 보니 육십일 일째 술 한 방울 담배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이런 걸 세는 걸 보니 다시 먹을 날이 머지않았구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 육십오 일째 되던 날, 제대로 먹고 말았다. 그리운 봄밤, 보배로우면서도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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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from text 2009/05/04 22:52
낯선 오월의 시작, 나흘 연휴를 그저 흘려보내긴 아쉬울 듯해 색색이 채 가시지 않은 멍을 달고 혼자 '박쥐'를 보러 나섰다. 어제오늘 왼쪽 새끼발가락에 몇 년 잊고 있던 무좀까지 도져 절뚝거리며 동성로 거리를 지나다녔다. 대기는 뜨거웠고, 작은 머리는 이내 열로 가득 차 일찍 지쳤다. CGV 아이맥스관, 욕망과 죄의식에 대한 그럴듯한 설정과 변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상징이 흥미로웠다. 성당인지 수도원인지 배경이 된 곳은 돌 벤치 하나하나, 자갈까지도 손에 잡힐 듯 그리운 것이었다. 가외로는 여자의 행위와 변명에 대한 오래된 것의 재확인도 있었다. 다음은 박완서의 소설 '그 남자네 집'에서 한 대목. 얼핏 지나간 모든 것들이 영역을 재배치한다. 제가끔 삐걱댄다.

그러나 그건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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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여섯 시

from text 2009/04/28 21:55
바람이 불고 철 지난 벚나무 검붉은 입술이 울고 꿈결처럼 대낮부터 미등 불빛들이 꼬리를 물고 신천으로 흐르더니, 오후 여섯 시, 따닥따닥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창가에 선 나는 문득 파충류에서 포유류로 넘어가는 찰나, 시커먼 하늘 아래 콘크리트 건물들이 비로소 제 색깔을 드러낸다. 삽시간에 인적이 사라지고 고깔을 닮은 우산 하나 하늘을 날아오르는데 문득 새로운 것 하나 이렇게 세상에 떨어진다. 칼국수와 묵밥을 사이에 두고 오랜 시간이 흐른다. 그리운 것들 잠시 접어두고 고요한 휴식을 시작한다. 다음은 김사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에서 노숙 전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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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

from text 2009/04/27 23:58
그제 토요일, 오랜 잇몸치료 끝에 드디어 임플란트와 뼈이식 수술을 했다. 뼈이식의 양이 많고 앞니 쪽이라 많이 부을 거라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부풀어 오를 줄은 몰랐다. 어제는 혹성탈출 주요 엑스트라의 형상이더니 오늘은 멍까지 들어 집단 린치당한 둘리의 몰골이 따로 없었다. 아침에는 원체 상태가 메롱인지라 조퇴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들 등을 떠밀어 그나마 흉한 꼴을 덜 보일 수 있었지만, 덜 아물어도 모레쯤엔 나가야 할 테니 참 이런 봉변이 없다 싶다.

어쨌든 덕분에 어제오늘 어쩐지 보기 싫어 밀쳐두었던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을 수 있었다. 방금도 자판이 절로 그리 가기도 했지만, 읽는 한참 동안 '봄은 노래한다'처럼 읽히기도 했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단편 서너 편만 읽고 덮었을 때처럼 역시 묘하게 글을 잘 쓴다 했다. 본문 중 한 대목. 그리고 며칠 반복해 들었던 문승현의 '오월의 노래'.

여자와는 그렇게 헤어지는 거야. 아마도 이정희 선생도 저승에서 꺄르르꺄르르 웃고 있을 것이네. 그만하면 자네도 할 만큼 했으니까.

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 져 흩어지고 꽃향기 머무는 날
묘비 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이렇듯 봄이 가고 꽃 피고 지도록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
해 기우는 분수 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 앙천에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이여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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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from text 2009/04/14 19:38
스산한 봄이로고. 약속도 다짐도 없이 찾아온 고단한 봄이로고. 모눈에 갇힌 다족류 모양 갈 곳 잃은 봄이로고. 기대면 푸석푸석 마른 먼지 날리고야 마는 사랑하는 봄이로고.

직선은 왜 직선인가. 어떤 연유로 곧게 뻗어 너와 나를 나누고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가. 무수한 너를 관통하여 한 줄에 꿰기도 하고 때로는 버리고 다시 돌아보지 않는가. 오랜 수직의 꿈을 어찌 다시 찾지 않는가.

지난날, 다시 지날 수 없는 날이 그리워 목매단 한 떨기 푸른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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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from text 2009/03/29 23:41
어제 예정에 없던 사랑니를 뽑았다. 오른쪽 아랫잇몸 수술 도중 앞쪽 어금니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거라며 뽑은 것인데, 지금껏 그로 인한 어떤 증상도 없었던 데다 잇몸 아래 숨겨져 있어 나로서는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유일한)사랑니여서였을까. 그간 존재조차 몰라서였을까. 처방전을 들고 치과를 나와 약국으로 가는 동안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매주 한 시간 안팎을 의사나 간호사 앞에 입을 딱 벌리고 누워 좋지 않은 속을 드러내고 있다 보면 일종의 자기 모멸감 내지는 자기 연민에 젖어들곤 하는데, 이날은 특별히 더 뭔가 위안이 필요한 기분이었다.

중앙통 거리는 발랄하고 흥겨웠다. 새치름한 날씨에 제 모양을 잃고 우중충히 돌아앉은 봄꽃들과 달리 거리의 여인들은 날씨 따위 아랑곳없이 통통 튀었다. 위안거리 삼아 뭐라도 지를 품새로 가까운 백화점엘 들러 에스컬레이터로 맨 위층까지 올랐다가는 그냥 내려왔다. 그리고는 술 먹은 다음날이면 자주 사먹곤 하던(술을 먹지 않고부터는 생각나지도 않던) 수제 햄버거 가게에서 거즈를 앙다문 입으로 점원과 가벼운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햄버거와 샐러드를 포장해 들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보니 한 시간을 훌쩍 넘겨 돌아다니다 온 것이었다. 마취가 풀리며 진료 시작 후 신경치료 이래 가장 큰 통증과 연민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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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명

from text 2009/03/18 20:16
사십여 일 술도 담배도 멀리 하였다. 반가운 얼굴들, 어쩔 수 없는 자리, 돌아온 봄을 핑계로 서너 차례 많고 적게 마시고 피웠으나, 열흘 가량은 참말 딱 잊고 지냈다. 욕망이 거세된 듯 거짓말처럼 조금도 생각나지 않고 주변의 유혹도 방해도 없었다. 매주 꼬박꼬박 기약 없이 이어지는 치과 진료와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사는 모양이 제법 달라지기도 한 것이다.

어제오늘 집 앞 도로변에 피기 시작한 벚꽃이며 오며가며 남의 집에 핀 소담한 목련을 보고도 무심키만 하더니, 한낮 봄바람에 실려 멀리 그늘진 옹벽에 샛노랗게 핀 개나리 한 무리를 보고는 꽃을 두고도 한잔 술을 떠올리지 못하는 생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였다. 부질없는 고집과 날리는 꽃잎보다 가벼운 사람살이며, 오가는 계절과 가고 오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오래 생각하였다. 무릇 진통 없는 생산이야 없을 터, 비로소 너와 나는 이렇게 근접하는 것인가, 슬픈 밀명에 울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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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리오

from text 2009/03/16 00:11
사라지는 해를 잡으려 부러진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였다. 봄이 오다만 길목, 지워진 메아리가 울고 있었다. 절정의 순간을 미루거나 지나친 흔적들이 거기, 살고 있었다. 어차피 눈 한번 돌리는 대로 재구성되는 세상이었거니, 한 꺼풀 벗겨낸 자리엔 색색이 셀로판지 모양 예쁜 꽃이 피었다. 후미진 술집 낡은 모니터에선, 후욱, 썩은 입김을 타고 멜빵바지, 화면 위로 가볍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조용히 구겨져 나발이나 불고 더 낮게 욕이라도 웅얼거릴 때가 좋았지, 상마다 곱게 얹힌 검은 머릴 신나게 퉁겨 오르고 있었다. 봄이 돌아간 길목, 그렇게 버려진 꿈들이 버섯보다 거대하게 부풀고 있었다.

봄, 그러나

from text 2009/03/10 14:36
어제 왼 주문. 어찌 이만한 행사에 한잔 술이 없으랴. 결속과 이별이 곱게 내려앉는 봄, 삼백 년 하고도 석 달 열흘 만의 술에 한 개비 궐련이 또한 없으랴.

다음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제 사라마구. 늘 맹세를 지킬 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의지가 약해서, 때로는 우리가 고려하지 못했던 어떤 우월한 힘 때문에.

* 지난달, 무려 0.049% 확률의 카드사 경품 응모에 당첨되었다. 애플의 아이팟 터치 2세대. 제세공과금 22%를 물고 손에 쥔 행운, 잠시 만져보곤 왜 '애플'을 이야기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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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Partner

from text 2009/02/16 06:17
두 주째 토요일마다 치과 진료를 받고 있다. 스물다섯 군 복무 때 어이없이 다친 앞니 두 개와 잘못된 생활 습관이 오늘에 이르게 하였을 것이다. 루시드 폴의 음성을 가진, 드물게 신뢰할 만한 스타일의 젊은 담당 의사는 육 개월, 또는 그 이상의 치료 전망을 내놓았다. 지난주엔 공들인 치석 제거, 이번 주엔 발치 세 개. 0124님 동료들 보기에도 그렇고, 폴의 부름에 나 역시 신뢰로 적극 응답할 작정이다.

지난주 진료 후엔 워낭소리를 보았다. 소가 나오고 농촌 풍경이 주로 보일 모양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티켓에 찍힌 'Old Partner'에 눈길이 가더니, 보는 내내 그 영문 제목이 따라다녔다. 어린 시절 시골 사람들과 풍경도 내내 함께 하였다. 가장 좋았던 지점은 단 한 번 노인이 제 몫을 벗어나는 오랜 파트너의 면상을 모질게 후려치는 장면이었다. 그 한 장면으로 모든 리얼리티가 살고 다큐멘터리는 완성되는 듯 보였다. 어릴 적 시골 풍경도 온전히 되살아나는 듯 했다. 최근 60만 관객을 돌파하였다는데 반가운 일면 남이 하는 걸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 동네 풍토엔 역시 살짝 질리기도 한다. 서편제를 본 그 많은 사람들은 보고난 후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문득 다시 궁금하다.

돌이켜보면 특정한 이념이나 사람, 드물게 생업에 연관된 어떤 것들이 삶을 꾸리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되었으나, 그 중심엔 늘 술이 있었던 듯. 언젠가부터 그걸 축으로 전체 얼개도 짜고 일정도 잡았다. 과음과 폭음을 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절제된 삶, 그게 가져다 줄 세상이 짐짓 두렵기만 하다. 꼬박 스물세 해 이어온 녀석들, 한 녀석은 영영 멀어질지도 모르겠다만, 다시 만났을 때 놀라거나 놀리지는 말아다오. 내가 어떻게 사랑하고 너에게만은 최선을 다했는지 잘 알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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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from text 2009/01/21 12:55
저들의 목표와 무기는 명확하다. 전시, 각자가 작전통제권자, 제 몫 제 역할을 할 밖에.

사계 3

from text 2009/01/20 19:27
어디에 있었나요. 지난 밤 꿈 그렇게 왔다 기약 없이 가고는. 해가 바뀌고 날이 몹시 차던가요. 어느 모퉁이 또 준비도 없이 맞닥뜨릴까, 이젠 시린 잠도 들지 못하게 하고선. 아침부터 기우는 수직선 너머, 오늘은 하얗게 질린 하늘에서 설핏 지나간 내 마음도 보았지요. 다친 마음, 고왔던 자리가 당신을 부르고 있었지요. 만난 자리 하나하나 만나며 지웠던 건 누구의 의지였을까, 묻고 있었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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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2

from text 2009/01/11 01:04
42킬로미터를 뛰었다고 195미터를 마저 뛰어야만 할까.

세계정세와 공화국의 현재, 늘 그랬겠지만 말 그대로 전장인 삶, 앓는 체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눈알만 굴리고 사는 대로 살자니 심장이 가벼워 못 견디겠다.

자유, 경제로부터, 권력으로부터, 보살핌으로부터, 대우로부터, 그리고 구차와 비겁으로부터, 가면과 거짓으로부터, 스스로 용서받고 일용할 양식을 늘리는 스스럼없는 군상으로부터, 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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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2

from text 2009/01/10 23:43
꿈이라고 다 꿈꾸는 자의 몫일 수는 없는 것. 잊고자 마신 술은 그를 뺀 나머지 전부를 잊게 만들었다. 만난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상처에 돋는 새살처럼, 다른 기억이 살아나며 그를 잊을 수 있었으나, 모든 건 달라져 있었다. 비루한 사랑은 원망과 한탄을 지나 불구의 몸뚱아리를 만들어 놓았다. 인생의 무수한 틈과 달라진 시간은 어떠한 복기로도 정수를 알 수 없게 하였다.

한때 우리는 세상과 인간의 다채로운 결에 대해 이해하기를 멀리 했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단일한 이론으로 세상과 삶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결국 사랑하지 않았거나 사랑할 줄 몰랐던 거다. 물론 지상에 사랑이란 건 애초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저도 어느 쪽이든 비집고 들 틈이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내가 다른 N들에게 느꼈던 것처럼, 소녀 취향의 감성에 질리기도 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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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lon night

from text 2009/01/01 03:17
한 해의 마지막 날, 바람도 시린 몸을 달래 주었다. 수성아트피아에서 만난 루시드 폴, 이틀 공연의 이틀째 공연, 따로 또 같이 오랜 불구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다, 누군들.

미류나무 그늘진 저 강나루 물새는 오늘따라 어디로 간 걸까
빗속 말없이 봇짐 꾸리던 내 님이 못 올 사공인 줄은 몰랐네
강물 속 붕어들아 저 물길을 조금만 막아다오
축지하듯 찬물 따라 홀홀히 멀어진 그대는 가네 가네

온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운 오늘 밤에 소리죽여 흐느끼는 그대
나는 듣고 있어 멀어지는 당신 모습 까만 점이 될 때까지
눈물 없이 견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벌써 새벽일까 닭이 우는 소리
하늘은 금세 빛을 찾아 어김없이 다가오는 아침
마지막 하늘의 빛 찰나의 시간 멈춰버린 시계의 추
봄빛 살갑게 내려쬐던 단오의 햇살
백일 동안 다시 백일 동안 나를 싣고 가는 배야
잊지 말라는 그대 소리 아직 들려 무심한 물빛 따라

'가네'와 '빛'의 노랫말. 첫 소절 듣자마자 뇌리와 가슴에 바로 박힌 노래는 '빛'의 배경을 이야기하며 슬쩍 불러 준 이 '가네'였다. 몹쓸 귀는 다른 노래들과 이 노래로 그의 노래들을 단박에 구분하여 버렸다. '가네'의 답가로 지은 게 '빛'이라며 떠나는 남자의 슬픔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였는데, 곡조에 반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역시 남은(남겨진) 자의 슬픔에 대한 공감이 컸다. (멋진 녀석이었다. 옛날, 조동진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웠다.)

존재가 의식을 배반하려는 걸 어찌 해야 할까.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는 걸 용납하였던 것처럼 내버려두어야 할까. 모른 척, 그래도 좋을까.

지렁이 소고

from text 2008/12/27 09:09
춘하추동, 잎 피고 꽃 지는 내력
더는 들어 알 것 없다마는
더러 숨죽여 우는 것은
방금 왔다 금방 가는 까닭이다
따로 또 떨어진 몸이
부럽기도 한 것이다
꽃 분분, 눈 분분
이렇게 흐리기도 한 날이면
오가는 내력 문득
궁금하기도 한 것은
서정에 물든 나도, 어느새 저렇게
갔다가는 오고 싶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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