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봄, 그러나 2009/03/10
  2. Old Partner 2009/02/16
  3. 전시 2009/01/21
  4. 사계 3 2009/01/20
  5. 꿈 2 2009/01/11
  6. 사계 2 2009/01/10
  7. nylon night 2009/01/01
  8. 지렁이 소고 2008/12/27
  9. 진눈깨비 2008/12/21
  10. 부활 2008/12/20
  11. 폭풍 2008/12/17
  12.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2008/12/05
  13. 꿈인들 곱게 2008/12/04
  14. 대화 2 2008/11/29
  15. 로드 2008/11/17
  16. 이 겨울도 2008/11/10

봄, 그러나

from text 2009/03/10 14:36
어제 왼 주문. 어찌 이만한 행사에 한잔 술이 없으랴. 결속과 이별이 곱게 내려앉는 봄, 삼백 년 하고도 석 달 열흘 만의 술에 한 개비 궐련이 또한 없으랴.

다음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제 사라마구. 늘 맹세를 지킬 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의지가 약해서, 때로는 우리가 고려하지 못했던 어떤 우월한 힘 때문에.

* 지난달, 무려 0.049% 확률의 카드사 경품 응모에 당첨되었다. 애플의 아이팟 터치 2세대. 제세공과금 22%를 물고 손에 쥔 행운, 잠시 만져보곤 왜 '애플'을 이야기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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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Partner

from text 2009/02/16 06:17
두 주째 토요일마다 치과 진료를 받고 있다. 스물다섯 군 복무 때 어이없이 다친 앞니 두 개와 잘못된 생활 습관이 오늘에 이르게 하였을 것이다. 루시드 폴의 음성을 가진, 드물게 신뢰할 만한 스타일의 젊은 담당 의사는 육 개월, 또는 그 이상의 치료 전망을 내놓았다. 지난주엔 공들인 치석 제거, 이번 주엔 발치 세 개. 0124님 동료들 보기에도 그렇고, 폴의 부름에 나 역시 신뢰로 적극 응답할 작정이다.

지난주 진료 후엔 워낭소리를 보았다. 소가 나오고 농촌 풍경이 주로 보일 모양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티켓에 찍힌 'Old Partner'에 눈길이 가더니, 보는 내내 그 영문 제목이 따라다녔다. 어린 시절 시골 사람들과 풍경도 내내 함께 하였다. 가장 좋았던 지점은 단 한 번 노인이 제 몫을 벗어나는 오랜 파트너의 면상을 모질게 후려치는 장면이었다. 그 한 장면으로 모든 리얼리티가 살고 다큐멘터리는 완성되는 듯 보였다. 어릴 적 시골 풍경도 온전히 되살아나는 듯 했다. 최근 60만 관객을 돌파하였다는데 반가운 일면 남이 하는 걸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 동네 풍토엔 역시 살짝 질리기도 한다. 서편제를 본 그 많은 사람들은 보고난 후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문득 다시 궁금하다.

돌이켜보면 특정한 이념이나 사람, 드물게 생업에 연관된 어떤 것들이 삶을 꾸리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되었으나, 그 중심엔 늘 술이 있었던 듯. 언젠가부터 그걸 축으로 전체 얼개도 짜고 일정도 잡았다. 과음과 폭음을 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절제된 삶, 그게 가져다 줄 세상이 짐짓 두렵기만 하다. 꼬박 스물세 해 이어온 녀석들, 한 녀석은 영영 멀어질지도 모르겠다만, 다시 만났을 때 놀라거나 놀리지는 말아다오. 내가 어떻게 사랑하고 너에게만은 최선을 다했는지 잘 알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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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from text 2009/01/21 12:55
저들의 목표와 무기는 명확하다. 전시, 각자가 작전통제권자, 제 몫 제 역할을 할 밖에.

사계 3

from text 2009/01/20 19:27
어디에 있었나요. 지난 밤 꿈 그렇게 왔다 기약 없이 가고는. 해가 바뀌고 날이 몹시 차던가요. 어느 모퉁이 또 준비도 없이 맞닥뜨릴까, 이젠 시린 잠도 들지 못하게 하고선. 아침부터 기우는 수직선 너머, 오늘은 하얗게 질린 하늘에서 설핏 지나간 내 마음도 보았지요. 다친 마음, 고왔던 자리가 당신을 부르고 있었지요. 만난 자리 하나하나 만나며 지웠던 건 누구의 의지였을까, 묻고 있었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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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2

from text 2009/01/11 01:04
42킬로미터를 뛰었다고 195미터를 마저 뛰어야만 할까.

세계정세와 공화국의 현재, 늘 그랬겠지만 말 그대로 전장인 삶, 앓는 체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눈알만 굴리고 사는 대로 살자니 심장이 가벼워 못 견디겠다.

자유, 경제로부터, 권력으로부터, 보살핌으로부터, 대우로부터, 그리고 구차와 비겁으로부터, 가면과 거짓으로부터, 스스로 용서받고 일용할 양식을 늘리는 스스럼없는 군상으로부터, 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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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2

from text 2009/01/10 23:43
꿈이라고 다 꿈꾸는 자의 몫일 수는 없는 것. 잊고자 마신 술은 그를 뺀 나머지 전부를 잊게 만들었다. 만난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상처에 돋는 새살처럼, 다른 기억이 살아나며 그를 잊을 수 있었으나, 모든 건 달라져 있었다. 비루한 사랑은 원망과 한탄을 지나 불구의 몸뚱아리를 만들어 놓았다. 인생의 무수한 틈과 달라진 시간은 어떠한 복기로도 정수를 알 수 없게 하였다.

한때 우리는 세상과 인간의 다채로운 결에 대해 이해하기를 멀리 했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단일한 이론으로 세상과 삶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결국 사랑하지 않았거나 사랑할 줄 몰랐던 거다. 물론 지상에 사랑이란 건 애초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저도 어느 쪽이든 비집고 들 틈이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내가 다른 N들에게 느꼈던 것처럼, 소녀 취향의 감성에 질리기도 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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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lon night

from text 2009/01/01 03:17
한 해의 마지막 날, 바람도 시린 몸을 달래 주었다. 수성아트피아에서 만난 루시드 폴, 이틀 공연의 이틀째 공연, 따로 또 같이 오랜 불구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다, 누군들.

미류나무 그늘진 저 강나루 물새는 오늘따라 어디로 간 걸까
빗속 말없이 봇짐 꾸리던 내 님이 못 올 사공인 줄은 몰랐네
강물 속 붕어들아 저 물길을 조금만 막아다오
축지하듯 찬물 따라 홀홀히 멀어진 그대는 가네 가네

온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운 오늘 밤에 소리죽여 흐느끼는 그대
나는 듣고 있어 멀어지는 당신 모습 까만 점이 될 때까지
눈물 없이 견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벌써 새벽일까 닭이 우는 소리
하늘은 금세 빛을 찾아 어김없이 다가오는 아침
마지막 하늘의 빛 찰나의 시간 멈춰버린 시계의 추
봄빛 살갑게 내려쬐던 단오의 햇살
백일 동안 다시 백일 동안 나를 싣고 가는 배야
잊지 말라는 그대 소리 아직 들려 무심한 물빛 따라

'가네'와 '빛'의 노랫말. 첫 소절 듣자마자 뇌리와 가슴에 바로 박힌 노래는 '빛'의 배경을 이야기하며 슬쩍 불러 준 이 '가네'였다. 몹쓸 귀는 다른 노래들과 이 노래로 그의 노래들을 단박에 구분하여 버렸다. '가네'의 답가로 지은 게 '빛'이라며 떠나는 남자의 슬픔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였는데, 곡조에 반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역시 남은(남겨진) 자의 슬픔에 대한 공감이 컸다. (멋진 녀석이었다. 옛날, 조동진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웠다.)

존재가 의식을 배반하려는 걸 어찌 해야 할까.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는 걸 용납하였던 것처럼 내버려두어야 할까. 모른 척, 그래도 좋을까.

지렁이 소고

from text 2008/12/27 09:09
춘하추동, 잎 피고 꽃 지는 내력
더는 들어 알 것 없다마는
더러 숨죽여 우는 것은
방금 왔다 금방 가는 까닭이다
따로 또 떨어진 몸이
부럽기도 한 것이다
꽃 분분, 눈 분분
이렇게 흐리기도 한 날이면
오가는 내력 문득
궁금하기도 한 것은
서정에 물든 나도, 어느새 저렇게
갔다가는 오고 싶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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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

from text 2008/12/21 09:19
만 권 책을 읽고 물을 건너 찾아다니면 무엇 하나. 제 어리석음 하나 깨치질 못하고 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더니, 사는 이치 다 아는 듯 점잔 빼고 앉았구나. 어리석어라, 사람아. 돌아갈 일 코앞이고 돌아올 날 기약 없다.

부활

from text 2008/12/20 00:37
톨스토이의 부활. 먹을 술 다 먹고, 공상할 것 다 하고, 아이에게 치이며, 습관대로 이 책 저 책 집적거리다 보니 첫 장을 넘기고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한참 걸렸다. 나중에는 네흘류도프와 떨어지기 싫어 일부러 그러나 싶을 만큼. 죽음의 한 연구 이후, 모처럼 화두를 붙들 듯 즐거움과 괴로움을 오래 함께 할 수 있었다. 딴에는 쫓기듯 읽은 게 그렇다. 어찌 진작 읽지 못했을꼬. 만나고 보면, 다 때가 되어 만난 것이겠지만. (때가 되지 않으면 만나도 만난 줄을 모르니, 헤어져도 헤어진 줄 모르기도 하는가.)

100년도 더 된 책에 최근의 그럴듯한 담론을 뛰어넘는 전언들이 가득하였다. 사소한 비유에 이르기까지 가장 정확하고 적절한 어휘를 구사하며, 어느 때고 냉정을 잃지 않고, 특히 인간과 관계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흐트러짐 없는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읽다 보면 그때의 러시아로부터 한 치도 나을 것 없는 세상과 인민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거장의 웅혼한 세계와 숨결도, 거인의 꼿꼿한 자태도. 오래전 읽어 조심스럽긴 하나 죄와 벌,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도스토예프스키보다 한두 갑절은 윗길인 듯. 다만 라스콜리니코프의 갑작스런 전향을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장은 떨떠름하였다. 책장을 덮으며, 옮길만한 대목을 표시하려 붙여놓은 포스트잇(책을 읽으며 이런 걸 붙여보긴 처음이다) 몇 장은 그냥 떼어냈다. 이래저래 부질없는 짓이 아닐 수 없으므로.

* 쪼그라든 심장만 달랑, 허공에 매어달린 느낌을 아는가. 기다리던 신형철의 책이 나왔다. 몰락의 에티카. 함께 주문한 책은 존 치버의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과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바로 전에 사다놓은 박이문의 나는 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서점에 가서 살폈으면 이 책을 샀을까. 대체로 글은 좋고 일종의 정보도 얻었으나, 터무니없는 책값까지, 어이없었다), 이청준의 신화의 시대, 그리고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까지, 읽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빠르다. 어쨌든 세상과 막막한 관계, 거리에 대한 위안거리는 장만한 것. 가보는 거다.

폭풍

from text 2008/12/17 21:26
연이틀 폭풍이 몰아쳤다. 난데없는 계시처럼 두드려 맞았다. 가슴 아랜 천길 낭떠러진데 짓누르는 힘은 천근이 넘었다. 막 헤어진 연인을 그리는 마음이 이럴까. 그렇게 짓밟힌 마음이 이럴까. 나무도 새도 꽃도 세상도 미동도 않는데 오롯이 저 혼자 감당하려니 외롭고 괴로웠다. 點心으로 월배까지 가 메기매운탕 한 그릇 먹고 나서야, 뜨거운 국물에 보드라운 속살을 뜯어먹고 나서야, 희멀겋고 넓적한 머리통, 그 길게 벌어진 주둥일 마주하고 나서야, 겨우 숙취를 즐기듯 여진을 즐길 수 있었다. 그제야 폭풍이요 계시인 줄 알았다. 매뉴얼 없이 해체 후 재조립한 것 마냥 여기저기 덜거덕거리긴 하지만 그예 형태는 갖추었다. 그나저나 그저 흘러가게 두면 좋으련만, 아무것도 아닌 인생, 그물에도 걸리는 바람처럼 여태 갈 곳 모르겠다. 아무려나, 짙은 피를 줄 터이니, 알았으니, 그만 튼튼한 심장을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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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한 날 우는 새들의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는 울음 멎게 술 한잔 부어줄걸 그랬나, 발이 젖어 멀리 날지도 못하는 새야

지난날을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두운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보아라

이병률의 시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전문. 이제야 읽은 '바람의 사생활'에서. 아직도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이 아름다운 생은 끝이 날까. 누가 얼른 와서 슬쩍 일러 다오. 가기 전, 술 한잔 부어줄 터이니.

* 아침, 마치 응답하듯 세찬 첫눈이 내린다. 괜스레 들뜨는 이 마음만 갖고도 한 세상 넉넉하지 않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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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들 곱게

from text 2008/12/04 16:33
이런저런 일로 0124님과 메신저를 주고받다, 굴곡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난데없는 말에, 정당하게, 정직하게, 가난하게 살고 싶단 생각 요즘 자주 한다 전했더니, 저는 고요하게, 저항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단다. 그래, 꿈인들 곱게, 곱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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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2

from text 2008/11/29 17:33
아침부터 바둑 두 판, 오목 네 판, 알까기 여덟 판으로도 모자라 놀아 달라 계속 보채는 녀석 겨우 달래고 좀 집중해서 책을 보고 있자는데, 난데없는 질문을 던지는 통에 토요일 오후 모처럼 재미있는 대화가 이어졌다. 이 글은 이 대목까지 포함하여 서연이의 검토 후 올리는 것이다. 대화 직후 스케치북에 날려 쓴 걸 모니터를 보며 함께 옮긴 것, 내용에 별 수정은 없었지만 어미나 조사를 꽤 바꿔야했다.

아빠랑 서연이가 없었을 때는 우리 어디 있었어요?
아빠랑 서연이가 없었을 때 우리는 없었지요, 뭐.
아니요, 우리가 없었을 때는 우리 어디 있었냐구요?
서연이는 아빠하고 엄마하고 결혼해서 태어났고요,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결혼해서 태어났잖아요.
증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 이런 것도 없었을 때는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을 때요?
네.
그때도 동물들은 있었지요.
근데요, 동물들도 없고 아무도 없었을 때는요?
그때는 아무 것도 없었지요, 뭐.
아니요, 지구도 없고 목성도 없고, 토성 이런 것도 없고, 그럴 때요?
그럼, 아무 것도 없는 거지요, 뭐.
아, 정말! 아니요, 하늘나라가 있잖아요?
하늘나라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건 알 수 없어요.
왜요?
알 수 없으니까요.
가본 사람이 있잖아요?
누구요?
죽은 사람이요.
근데 갔는지 모르잖아요.
왜요?
갔다가 다시 온 사람이 없으니까요. 하늘나라에 갔는지 그냥 없어졌는지 모르잖아요.
아, 재밌다. 근데요, 지구 위에는 하늘이 있잖아요, 그 위에는 뭐예요?
지구 위에는 우주지요, 지구도 우주의 한 부분이고요.
우주 위에는요?
우주는 그냥 우주지요, 그 위에도 다 우주고요.
우주 끝에 가면은요?
그래도 다 우주예요. 신기하지요?
네.
아빠도 신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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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from text 2008/11/17 23:53
며칠 코맥 매카시의 로드에 빠져있었다. 절반은 Eleni Karaindrou의 Elegy of the Uprooting과 함께, 절반은 그마저도 없이. 도저한 절망과 많은 시들이 있었고, 예언과 사랑이 있었다. 아버지로서, 하나의 생물체로서 나는, 우리는 무엇인가, 무엇일 수 있는가 끊임없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로드의 잿빛과 맞물려 그런가, 갈수록 찬 바람은 어찌 이리 서글프기만 한지 모르겠다. 돌돌돌돌 구르는 죽은 잎들의 소리. 그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더 스산한 일인지. 다시 책을 펼치며 손에 집히는 대로 그 세계의 편린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그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잊고 잊어버리고 싶은 건 기억하지.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무릎에 올려놓고 있다. 여름 드레스의 얇은 천 너머로 스타킹 끝 부분이 느껴진다. 이 장면을 고정시켜라. 이제 어둠과 추위를 내려달라고 해라. 저주를 받아라.

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例)가 사라지면 그와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사라져버린다. 당신 주위를 돌아보라.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남자는 소년이 불을 지피는 것을 지켜보았다. 신의 불을 뿜는 용. 불꽃들이 위로 솟구쳐올라 별이 없는 어둠 속에서 죽었다. 죽기 전에 한 말이라고 모두 진실은 아니야. 이 행복은 그 터전이 사라졌다 해도 변함없이 진짜야.

리볼버에는 총알이 한 알만 남았다. 네가 진실과 직면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저 사람들이 널 발견하면 그래야 돼. 알았지? 쉬. 울면 안 돼. 내 말 들려? 어떻게 하는지 알지. 그걸 입 안에 넣고 위를 겨냥해. 빨리 세게 해야 돼. 알았지? 울지 말라니까. 알아들었지?

지금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들이 이 피난처를 찾아내지 못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늘 어서 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위험하게도 이 횡재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에도 했던 말을 했다. 행운이란 이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 남자는 거의 매일 밤 어둠 속에 누워 죽은 자들을 부러워했다.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는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되었으며, 그들은 콧노래로 신비를 흥얼거렸다.

이 겨울도

from text 2008/11/10 16:52
실로 얼마 만에 사보는 음반인가. MP3 플레이어를 사고 나서는 생각날 때마다 파일들만 찾아 헤맸는데, 간단히 파일 변환하는 방법도 알았고, 우선 눈에 띈 율리시즈의 시선 OST를 작곡한 Eleni Karaindrou의 Elegy of the Uprooting과 Music For Films를 샀다. 덩달아 산 책은 오정희의 돼지꿈, 톨스토이의 부활,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가을을 지나며 책도 음악도(그렇지, 필름도) 한가득 쌓았으니 천천히 즐길 일만 남았다. 좀 덜 두리번거리고(그래야 덜 지르고 덜 질릴 일이다) 내 안으로 발밑으로 향할 땐가 한다. 술 마시기 좋은 계절, 이 겨울도, 그저 비껴가긴 다 틀린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