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가을, 문득 2 2009/10/03
  2. 지우개 5 2009/09/18
  3. 어떤 그리움 2009/08/19
  4. 어느 날 어느 때 2009/08/12
  5. 어쩌면 3 2009/07/27
  6. 여름 2009/06/26
  7. 우리는 누구나 2009/06/08
  8. 발자국 2009/05/24
  9. 2009/05/09
  10. 오월 2009/05/04
  11. 오후 여섯 시 2009/04/28
  12. 조우 2009/04/27
  13. 봄날 2009/04/14
  14. 사랑니 2009/03/29
  15. 밀명 2009/03/18
  16. 슈퍼마리오 2009/03/16

가을, 문득

from text 2009/10/03 23:07
나에겐 결정권이 없어. 인생은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을 했어. 다 거기서 초래된 일이지. 결산은 꼼꼼하고 조금의 빈틈도 없어.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도 지울 수 없어. 당신 뜻대로 동전을 움직일 수는 없지. 절대로. 인생의 길은 쉽게 바뀌지 않아.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더구나 없지.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중에서. 추석 연휴 전날, 벼르던 이사를 했다. 결혼하고 다섯 번째 집. 일이 되려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을 만큼 일이 맞물려 돌아가 한편 내몰리듯이 일이 진행되었다. 주공에서 미분양 아파트를 매입하여 임대하는 것으로, 첫째가 내년에 갈 초등학교는 거리가 좀 있어 아쉽지만 두 사람 직장이나 둘째를 봐주시는 어머니 댁에서 두루 가까워 좋다. 곱절 가까운 전세금에다 새로운 공간에 맞춰 거실에 소파며 책장을 들이고 낡은 세탁기를 바꾸고 아이 방에 침대와 책걸상, 책장 등을 놓으니 모양은 그럴듯한데 먹고사는 일이 새삼스럽다. 무릇 십만 원을 쓸 때 고민하던 것이 만 원 한 장 쓸 때 고민하게 되면 그것을 쓸 때 누리는 혜택과 즐거움은 물론, 더러 만 원, 십만 원이 생겼을 때 얻는 기쁨 또한 열 배는 될 터, 이제야 벌고 쓰는 재미를 제대로 배우려나 모르겠다만.

이달 말이면 이 별에서 꼬박 마흔 해를 보내게 된다. 빤히 치어다보는 가을, 문득 묻어나는 얼굴이 바람처럼 맵고 흐리다.

지우개

from text 2009/09/18 16:13
지우다 보면 지우는 지우개도 지워지기 마련, 지운 기억도 그렇게 지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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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리움

from text 2009/08/19 10:25
모든 게 아련하기만 하다. 이 여름은 누굴 닮아 지치는 기색도 없이 겨울처럼 아득하고, 어떤 그리움을 핑계로 또다시 퍼마신 날, 산도 들도 바람도 퍼렇게 멍이 들었었다. 다음은 정근표의 구멍가게 중에서 한 대목.

식이 아재는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그렇게 돈을 맡겨놓고 뒤뚱뒤뚱 가게를 걸어 나갔다. 그런 식이 아재의 뒷모습에서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세상을 밝히는 작은 빛을 보았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끙끙거리는 아이처럼 한동안 식이 아재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수록 머리가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이 세상에는 그때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목다운 거목이 갔다. 이로써 거인들의 시대는 다 가버린 듯.

어느 날 어느 때

from text 2009/08/12 23:47
가을 하늘이 푸르고 아름답다는
그저 그것만으로
어쩐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때는 없는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허무하게 땅에 떨어지는 분수도
쓸쓸하게 가지를 떠나는 낙엽 한 잎마저
어쩐지 기쁨에 겨워 춤추는 양 보이는
그런 때가

유정 편역의 일본현대 대표시선에서 쿠로다 사부로오의 시 '어느날 어느때' 전문. 전세 계약 기한은 다가오지만 어째 나갈 일은 멀기만 하여 이사 이후로 미뤄두었던 집안 정리와 재편을 감행하였다. 거실에 있던 TV와 홈시어터 시스템을 없애고(TV는 중고재활용센터에, 홈시어터 시스템은 동생에게 넘겼다) 어렸을 때부터 쓰던 책장에 새로 산 원목 책장 둘을 더해 거실 한쪽 벽면을 서가로 꾸몄으며 컴퓨터를 거실로 내오고 좌탁과 장식장 위에 놓을 책꽂이도 새로 구입하였다. 어지럽던 물건들과 작은방 둘도 말끔히 정리하였더니 새로 이사한 기분인 것이 진을 빼버려 이제 고대하던 이사 일정이 잡힌대도 옮길 엄두가 나지 않을 지경이다.

마루야마 겐지에 빠진 와중에 머리를 식히며 읽은 책 중 추천하는 한 권. 강명관의 '是非를 던지다'. 글 솜씨도 좋지만 따뜻한 심성과 시각이 좋아 더 정겹게 읽혔다. 읽는 내내 정민의 글과 비교가 되었다. 본문 중 이익의 붕당론에서 한 대목.

이제 열 사람이 꼭 같이 굶고 있다가 밥 한 그릇을 먹게 되었다고 해 보자. 그릇을 다 비우기 전에 싸움이 벌어진다. 물어보니, 말이 불손한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불손한 말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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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from text 2009/07/27 23:18
된통 한 방 먹은 기분이다. 싫은 건 싫고, 잡문을 잡스럽게 쓰거나 행동에서든 언사에서든 무슨 꼬투리라도 잡힐라치면 이후론 거들떠도 안 보곤 했었는데, 사실 이제는 그런 기억조차 잊고 먹고사는 일인데 다들 절로 이해도 되고 그렇게 헤아리는 것이 또 나이를 제대로 먹는 것도 같았는데, 스스로 꼬락서니가 우습기도 하고 가련키도 하다. 헛살기까지야 했겠냐 싶으면서도 무언가를 놓치고는 그 사실마저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니 더 늦기 전에 이렇게라도 떠밀린 것이 천만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소설가의 각오와 소설집 여름의 흐름을 읽고 든 생각이다. 되풀이 읽는 동안 이대로 살면 될까, 그래도 좋을까, 나중에도 괜찮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산문집을 먼저 읽어서인지(습관처럼 때때로 번갈아 읽어서인지) 데뷔작인 여름의 흐름 한 작품을 빼곤 산문에서의 얼굴이 내내 소설 속에 디밀어져 반갑고 무섭고 때로 참혹했다. 장편을 두어 권 골라 그의 세계에 더 오래 침잠할까 싶다.

소설가의 각오는 한참 전에 보고 놓아두었다 소설집을 읽으며 다시 꺼냈던 것인데 읽는 맛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억지스러움도 느끼고 닿지 못할 세계를 추구하는 아집도 느꼈던 것이 이번엔 치열한 정신과 굳건한 육신을 만나는 긴장과 즐거움을 한가득 느꼈으니 말이다. 소설에서는 무언가 제대로 벼린 느낌, 오래 잊고 있던 어떤 것(무거우나 매력적인 정서랄까, 시적 집요함이랄까, 잘 모르겠다)을 만난 느낌을 잔뜩 받았다. 따로 떼어 한 대목을 고를 수 없는 유형의 글들이라 소설에서도 몇몇 심장을 찌르는 대목을 옮기다 말고, 소설가의 각오에서 한 대목과 거기에 실린 인터뷰 중에서 한 대목만 옮긴다. 지나간 모든 것들은 지나간 자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지나간 자리만이 지나간 것들을 반추할 뿐이다. 어쩌면.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카드에 기대를 거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럴싸한 카드가 손에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열어본다. 흔해빠진 카드라도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슨 까닭에서인지 이 방법이 훨씬 강하다.

미시마 유키오가 마흔다섯 살 나이로 죽었을 때, 나는 아직 젊었죠. 그래서 이런 일도 마흔다섯 살이 되면 진력이 나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막상 마흔다섯 살이 되고 보니, 그 사람은 왜 겨우 마흔다섯에 포기하고 말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문학 자체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문학 주변에 떠도는 아지랑이 같은 것에 매력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런 결말을 맞이한 것이 아닐까 싶군요. 소설가의 재능이란, 소설 이외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요.

* 벼르던 올림푸스 E-P1은 예판 때 시간 맞춰 주문 넣었다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돌연 취소하고 말았다. 오늘 있은 500대 한정 판매 정발도 그냥 지나쳤다. 예판 주문 취소 후엔 짧은 후회도 있었지만 하도 달려들 드니 흥미도 애정도 반감되어 파나소닉 후속 기종이나 20mm 1.7 나올 때까지라도 미뤄둘 생각이다.

여름

from text 2009/06/26 13:22
바쁜 일과를 마친 아들의 손을 잡고 폭염특보가 내려진 거리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오후 여섯 시의 태양은 정면에서 바짝 얼굴을 겨눈다.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니 올 여름, 내 너를 상대해 주마. 사랑을 사랑으로 다스려 주마. 사람으로 사람을 잊고 거듭나는 이무기처럼 미끈한 몸뚱이를 날것으로 돌려주마.

나오자마자 사놓고 엊저녁에야 다 읽은 김규항의 예수전. 집요한 신앙고백 앞에 억지스러움을 넘어서는 숙연함을 느끼기도. 묵상에 대해 오래 묵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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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from text 2009/06/08 23:56
일요일 오후,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과 마더를 보았다. 터미네이터는 1, 2편의 신화를 제대로 계승하고 진화하여 새로운 시리즈의 서막으로 손색이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적절한 오마쥬로 지난 시리즈를 기리고 이야기를 완결함으로써 신화를 기억하는 이들을 위무하고 산뜻한 출발과 롱런을 기약하였다. 진정한 3편이자 1편.

제 허벅지에 침을 놓고 몸을 흔든다고 가슴의 응어리와 나쁜 기억을 떨칠 수야 없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마더가 아니라도 무언가를 위해 그렇게 몸부림친 경험이 있다. 그 기억이 새겨진 자리는 봄이면 새살이 돋다가도 잎이 지고 새가 울면 때맞춰 터지고 갈라진다. 경계하지 아니할 것을 경계하게 하고 경계할 것을 경계하지 아니하게 한다. 가꾸지 않으면 황폐하기 마련,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키지 않는다.

* 그보다 며칠 전엔 코렐라인 : 비밀의 문을 보았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서연이와 함께였는데 녀석이 이만큼 집중해서 영화를 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연방 무섭다면서 저도 나처럼 이 환상적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꼼짝없이 빨려들고 말았나 보다. 그 세계가 인상적이었던지 나중에 제 어미가 원작 코랄린을 사다 주었을 때에도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독파하는 걸 보았다. 유령신부, 크리스마스의 악몽과 함께 기억할 이름, 팀 버튼, 그리고 헨리 셀릭.

발자국

from text 2009/05/24 01:50
한 사나이가 갔다. 한 시대가 가듯 그렇게 갔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해 따라 날 저물 듯 스스로 걸어갔다. 공화국의 등짝에 선연한 발자국을 남기고 그렇게 갔다. 신동엽의 '散文詩 1'로 온종일 먹먹하던 가슴을 달래 본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 '담배 있나', 그게 사실이었든 아니든 그렇게 걸어간 마지막 길을 그보다 더 잘 상징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담배 한 대, 끝내 보류해 둔다마는 향 사르듯 사를 날을 또한 기약한다.

from text 2009/05/09 23:47
어제오늘 통영에서 뱃길 사십오 분 거리의 욕지도에 다녀왔다. 기억 속의 남해섬에 비길 바는 아니었으나 고즈넉하고 예쁜 섬이었다. 풍경을 잘 찍지 않는데다 일행(나까지 노소 남자 일곱 명)을 담을 일은 더욱 없겠다 싶어 귀찮은 마음에 사진기를 챙기지 않았는데 막상 담고 싶은 풍광이 많아 아쉬웠다.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을 맞으며 선상에서 바라본 남해 바다는 점점이 박힌 섬들까지 그대로 담백한 수묵화였다. 섬은 황토색 비탈밭과 색색깔 지붕을 인 낮은 집들이 짙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곱기 이를 데 없었으나 관광버스와 사람들, 이국적인 펜션들로 어지럽기도 했다.

숙소 주변에서는 모처럼 바닷가 낙조를 즐길 수 있었다. 내 속 어딘가도 새빨간 자국을 남기고 해가 지자마자 건너편엔 하얗게 달이 떴는데, 아침이면 저기서 다시 붉은 덩어리가 떠오르겠거니 했다. 시뻘건 초고추장에 날것 그대로의 앙상한 욕망을 나눈, 저마다의 봄밤, 보름을 하루 앞둔 달이 하도 밝아 별은 보이지 않는데 바다에 부서진 달빛은 천 갈래 만 갈래 제가끔 먼 곳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돌아올 때 보니 육지도 너도 하나의 섬이더라. 곱고 어지러운 하나의 파멸이더라.

헤아려 보니 육십일 일째 술 한 방울 담배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이런 걸 세는 걸 보니 다시 먹을 날이 머지않았구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 육십오 일째 되던 날, 제대로 먹고 말았다. 그리운 봄밤, 보배로우면서도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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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from text 2009/05/04 22:52
낯선 오월의 시작, 나흘 연휴를 그저 흘려보내긴 아쉬울 듯해 색색이 채 가시지 않은 멍을 달고 혼자 '박쥐'를 보러 나섰다. 어제오늘 왼쪽 새끼발가락에 몇 년 잊고 있던 무좀까지 도져 절뚝거리며 동성로 거리를 지나다녔다. 대기는 뜨거웠고, 작은 머리는 이내 열로 가득 차 일찍 지쳤다. CGV 아이맥스관, 욕망과 죄의식에 대한 그럴듯한 설정과 변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상징이 흥미로웠다. 성당인지 수도원인지 배경이 된 곳은 돌 벤치 하나하나, 자갈까지도 손에 잡힐 듯 그리운 것이었다. 가외로는 여자의 행위와 변명에 대한 오래된 것의 재확인도 있었다. 다음은 박완서의 소설 '그 남자네 집'에서 한 대목. 얼핏 지나간 모든 것들이 영역을 재배치한다. 제가끔 삐걱댄다.

그러나 그건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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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여섯 시

from text 2009/04/28 21:55
바람이 불고 철 지난 벚나무 검붉은 입술이 울고 꿈결처럼 대낮부터 미등 불빛들이 꼬리를 물고 신천으로 흐르더니, 오후 여섯 시, 따닥따닥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창가에 선 나는 문득 파충류에서 포유류로 넘어가는 찰나, 시커먼 하늘 아래 콘크리트 건물들이 비로소 제 색깔을 드러낸다. 삽시간에 인적이 사라지고 고깔을 닮은 우산 하나 하늘을 날아오르는데 문득 새로운 것 하나 이렇게 세상에 떨어진다. 칼국수와 묵밥을 사이에 두고 오랜 시간이 흐른다. 그리운 것들 잠시 접어두고 고요한 휴식을 시작한다. 다음은 김사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에서 노숙 전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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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

from text 2009/04/27 23:58
그제 토요일, 오랜 잇몸치료 끝에 드디어 임플란트와 뼈이식 수술을 했다. 뼈이식의 양이 많고 앞니 쪽이라 많이 부을 거라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부풀어 오를 줄은 몰랐다. 어제는 혹성탈출 주요 엑스트라의 형상이더니 오늘은 멍까지 들어 집단 린치당한 둘리의 몰골이 따로 없었다. 아침에는 원체 상태가 메롱인지라 조퇴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들 등을 떠밀어 그나마 흉한 꼴을 덜 보일 수 있었지만, 덜 아물어도 모레쯤엔 나가야 할 테니 참 이런 봉변이 없다 싶다.

어쨌든 덕분에 어제오늘 어쩐지 보기 싫어 밀쳐두었던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을 수 있었다. 방금도 자판이 절로 그리 가기도 했지만, 읽는 한참 동안 '봄은 노래한다'처럼 읽히기도 했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단편 서너 편만 읽고 덮었을 때처럼 역시 묘하게 글을 잘 쓴다 했다. 본문 중 한 대목. 그리고 며칠 반복해 들었던 문승현의 '오월의 노래'.

여자와는 그렇게 헤어지는 거야. 아마도 이정희 선생도 저승에서 꺄르르꺄르르 웃고 있을 것이네. 그만하면 자네도 할 만큼 했으니까.

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 져 흩어지고 꽃향기 머무는 날
묘비 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이렇듯 봄이 가고 꽃 피고 지도록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
해 기우는 분수 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 앙천에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이여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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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from text 2009/04/14 19:38
스산한 봄이로고. 약속도 다짐도 없이 찾아온 고단한 봄이로고. 모눈에 갇힌 다족류 모양 갈 곳 잃은 봄이로고. 기대면 푸석푸석 마른 먼지 날리고야 마는 사랑하는 봄이로고.

직선은 왜 직선인가. 어떤 연유로 곧게 뻗어 너와 나를 나누고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가. 무수한 너를 관통하여 한 줄에 꿰기도 하고 때로는 버리고 다시 돌아보지 않는가. 오랜 수직의 꿈을 어찌 다시 찾지 않는가.

지난날, 다시 지날 수 없는 날이 그리워 목매단 한 떨기 푸른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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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from text 2009/03/29 23:41
어제 예정에 없던 사랑니를 뽑았다. 오른쪽 아랫잇몸 수술 도중 앞쪽 어금니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거라며 뽑은 것인데, 지금껏 그로 인한 어떤 증상도 없었던 데다 잇몸 아래 숨겨져 있어 나로서는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유일한)사랑니여서였을까. 그간 존재조차 몰라서였을까. 처방전을 들고 치과를 나와 약국으로 가는 동안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매주 한 시간 안팎을 의사나 간호사 앞에 입을 딱 벌리고 누워 좋지 않은 속을 드러내고 있다 보면 일종의 자기 모멸감 내지는 자기 연민에 젖어들곤 하는데, 이날은 특별히 더 뭔가 위안이 필요한 기분이었다.

중앙통 거리는 발랄하고 흥겨웠다. 새치름한 날씨에 제 모양을 잃고 우중충히 돌아앉은 봄꽃들과 달리 거리의 여인들은 날씨 따위 아랑곳없이 통통 튀었다. 위안거리 삼아 뭐라도 지를 품새로 가까운 백화점엘 들러 에스컬레이터로 맨 위층까지 올랐다가는 그냥 내려왔다. 그리고는 술 먹은 다음날이면 자주 사먹곤 하던(술을 먹지 않고부터는 생각나지도 않던) 수제 햄버거 가게에서 거즈를 앙다문 입으로 점원과 가벼운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햄버거와 샐러드를 포장해 들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보니 한 시간을 훌쩍 넘겨 돌아다니다 온 것이었다. 마취가 풀리며 진료 시작 후 신경치료 이래 가장 큰 통증과 연민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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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명

from text 2009/03/18 20:16
사십여 일 술도 담배도 멀리 하였다. 반가운 얼굴들, 어쩔 수 없는 자리, 돌아온 봄을 핑계로 서너 차례 많고 적게 마시고 피웠으나, 열흘 가량은 참말 딱 잊고 지냈다. 욕망이 거세된 듯 거짓말처럼 조금도 생각나지 않고 주변의 유혹도 방해도 없었다. 매주 꼬박꼬박 기약 없이 이어지는 치과 진료와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사는 모양이 제법 달라지기도 한 것이다.

어제오늘 집 앞 도로변에 피기 시작한 벚꽃이며 오며가며 남의 집에 핀 소담한 목련을 보고도 무심키만 하더니, 한낮 봄바람에 실려 멀리 그늘진 옹벽에 샛노랗게 핀 개나리 한 무리를 보고는 꽃을 두고도 한잔 술을 떠올리지 못하는 생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였다. 부질없는 고집과 날리는 꽃잎보다 가벼운 사람살이며, 오가는 계절과 가고 오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오래 생각하였다. 무릇 진통 없는 생산이야 없을 터, 비로소 너와 나는 이렇게 근접하는 것인가, 슬픈 밀명에 울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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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리오

from text 2009/03/16 00:11
사라지는 해를 잡으려 부러진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였다. 봄이 오다만 길목, 지워진 메아리가 울고 있었다. 절정의 순간을 미루거나 지나친 흔적들이 거기, 살고 있었다. 어차피 눈 한번 돌리는 대로 재구성되는 세상이었거니, 한 꺼풀 벗겨낸 자리엔 색색이 셀로판지 모양 예쁜 꽃이 피었다. 후미진 술집 낡은 모니터에선, 후욱, 썩은 입김을 타고 멜빵바지, 화면 위로 가볍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조용히 구겨져 나발이나 불고 더 낮게 욕이라도 웅얼거릴 때가 좋았지, 상마다 곱게 얹힌 검은 머릴 신나게 퉁겨 오르고 있었다. 봄이 돌아간 길목, 그렇게 버려진 꿈들이 버섯보다 거대하게 부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