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75건

  1. 진눈깨비 2008/12/21
  2. 부활 2008/12/20
  3. 폭풍 2008/12/17
  4.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2008/12/05
  5. 꿈인들 곱게 2008/12/04
  6. 대화 2 2008/11/29
  7. 로드 2008/11/17
  8. 이 겨울도 2008/11/10
  9. 저 세상에 가면 잊을 수 있을까 2008/11/09
  10. 근황 2008/10/29
  11. MP3 2 2008/09/28
  12. 체제 깊숙이 2008/09/27
  13. 먼저 가서 4 2008/09/10
  14. 득병유시 치병유시 2008/09/08
  15. 가재미 2008/09/05
  16.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2008/09/05

진눈깨비

from text 2008/12/21 09:19
만 권 책을 읽고 물을 건너 찾아다니면 무엇 하나. 제 어리석음 하나 깨치질 못하고 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더니, 사는 이치 다 아는 듯 점잔 빼고 앉았구나. 어리석어라, 사람아. 돌아갈 일 코앞이고 돌아올 날 기약 없다.

부활

from text 2008/12/20 00:37
톨스토이의 부활. 먹을 술 다 먹고, 공상할 것 다 하고, 아이에게 치이며, 습관대로 이 책 저 책 집적거리다 보니 첫 장을 넘기고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한참 걸렸다. 나중에는 네흘류도프와 떨어지기 싫어 일부러 그러나 싶을 만큼. 죽음의 한 연구 이후, 모처럼 화두를 붙들 듯 즐거움과 괴로움을 오래 함께 할 수 있었다. 딴에는 쫓기듯 읽은 게 그렇다. 어찌 진작 읽지 못했을꼬. 만나고 보면, 다 때가 되어 만난 것이겠지만. (때가 되지 않으면 만나도 만난 줄을 모르니, 헤어져도 헤어진 줄 모르기도 하는가.)

100년도 더 된 책에 최근의 그럴듯한 담론을 뛰어넘는 전언들이 가득하였다. 사소한 비유에 이르기까지 가장 정확하고 적절한 어휘를 구사하며, 어느 때고 냉정을 잃지 않고, 특히 인간과 관계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흐트러짐 없는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읽다 보면 그때의 러시아로부터 한 치도 나을 것 없는 세상과 인민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거장의 웅혼한 세계와 숨결도, 거인의 꼿꼿한 자태도. 오래전 읽어 조심스럽긴 하나 죄와 벌,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도스토예프스키보다 한두 갑절은 윗길인 듯. 다만 라스콜리니코프의 갑작스런 전향을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장은 떨떠름하였다. 책장을 덮으며, 옮길만한 대목을 표시하려 붙여놓은 포스트잇(책을 읽으며 이런 걸 붙여보긴 처음이다) 몇 장은 그냥 떼어냈다. 이래저래 부질없는 짓이 아닐 수 없으므로.

* 쪼그라든 심장만 달랑, 허공에 매어달린 느낌을 아는가. 기다리던 신형철의 책이 나왔다. 몰락의 에티카. 함께 주문한 책은 존 치버의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과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바로 전에 사다놓은 박이문의 나는 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서점에 가서 살폈으면 이 책을 샀을까. 대체로 글은 좋고 일종의 정보도 얻었으나, 터무니없는 책값까지, 어이없었다), 이청준의 신화의 시대, 그리고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까지, 읽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빠르다. 어쨌든 세상과 막막한 관계, 거리에 대한 위안거리는 장만한 것. 가보는 거다.

폭풍

from text 2008/12/17 21:26
연이틀 폭풍이 몰아쳤다. 난데없는 계시처럼 두드려 맞았다. 가슴 아랜 천길 낭떠러진데 짓누르는 힘은 천근이 넘었다. 막 헤어진 연인을 그리는 마음이 이럴까. 그렇게 짓밟힌 마음이 이럴까. 나무도 새도 꽃도 세상도 미동도 않는데 오롯이 저 혼자 감당하려니 외롭고 괴로웠다. 點心으로 월배까지 가 메기매운탕 한 그릇 먹고 나서야, 뜨거운 국물에 보드라운 속살을 뜯어먹고 나서야, 희멀겋고 넓적한 머리통, 그 길게 벌어진 주둥일 마주하고 나서야, 겨우 숙취를 즐기듯 여진을 즐길 수 있었다. 그제야 폭풍이요 계시인 줄 알았다. 매뉴얼 없이 해체 후 재조립한 것 마냥 여기저기 덜거덕거리긴 하지만 그예 형태는 갖추었다. 그나저나 그저 흘러가게 두면 좋으련만, 아무것도 아닌 인생, 그물에도 걸리는 바람처럼 여태 갈 곳 모르겠다. 아무려나, 짙은 피를 줄 터이니, 알았으니, 그만 튼튼한 심장을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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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한 날 우는 새들의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는 울음 멎게 술 한잔 부어줄걸 그랬나, 발이 젖어 멀리 날지도 못하는 새야

지난날을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두운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보아라

이병률의 시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전문. 이제야 읽은 '바람의 사생활'에서. 아직도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이 아름다운 생은 끝이 날까. 누가 얼른 와서 슬쩍 일러 다오. 가기 전, 술 한잔 부어줄 터이니.

* 아침, 마치 응답하듯 세찬 첫눈이 내린다. 괜스레 들뜨는 이 마음만 갖고도 한 세상 넉넉하지 않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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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들 곱게

from text 2008/12/04 16:33
이런저런 일로 0124님과 메신저를 주고받다, 굴곡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난데없는 말에, 정당하게, 정직하게, 가난하게 살고 싶단 생각 요즘 자주 한다 전했더니, 저는 고요하게, 저항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단다. 그래, 꿈인들 곱게, 곱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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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2

from text 2008/11/29 17:33
아침부터 바둑 두 판, 오목 네 판, 알까기 여덟 판으로도 모자라 놀아 달라 계속 보채는 녀석 겨우 달래고 좀 집중해서 책을 보고 있자는데, 난데없는 질문을 던지는 통에 토요일 오후 모처럼 재미있는 대화가 이어졌다. 이 글은 이 대목까지 포함하여 서연이의 검토 후 올리는 것이다. 대화 직후 스케치북에 날려 쓴 걸 모니터를 보며 함께 옮긴 것, 내용에 별 수정은 없었지만 어미나 조사를 꽤 바꿔야했다.

아빠랑 서연이가 없었을 때는 우리 어디 있었어요?
아빠랑 서연이가 없었을 때 우리는 없었지요, 뭐.
아니요, 우리가 없었을 때는 우리 어디 있었냐구요?
서연이는 아빠하고 엄마하고 결혼해서 태어났고요,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결혼해서 태어났잖아요.
증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 이런 것도 없었을 때는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을 때요?
네.
그때도 동물들은 있었지요.
근데요, 동물들도 없고 아무도 없었을 때는요?
그때는 아무 것도 없었지요, 뭐.
아니요, 지구도 없고 목성도 없고, 토성 이런 것도 없고, 그럴 때요?
그럼, 아무 것도 없는 거지요, 뭐.
아, 정말! 아니요, 하늘나라가 있잖아요?
하늘나라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건 알 수 없어요.
왜요?
알 수 없으니까요.
가본 사람이 있잖아요?
누구요?
죽은 사람이요.
근데 갔는지 모르잖아요.
왜요?
갔다가 다시 온 사람이 없으니까요. 하늘나라에 갔는지 그냥 없어졌는지 모르잖아요.
아, 재밌다. 근데요, 지구 위에는 하늘이 있잖아요, 그 위에는 뭐예요?
지구 위에는 우주지요, 지구도 우주의 한 부분이고요.
우주 위에는요?
우주는 그냥 우주지요, 그 위에도 다 우주고요.
우주 끝에 가면은요?
그래도 다 우주예요. 신기하지요?
네.
아빠도 신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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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from text 2008/11/17 23:53
며칠 코맥 매카시의 로드에 빠져있었다. 절반은 Eleni Karaindrou의 Elegy of the Uprooting과 함께, 절반은 그마저도 없이. 도저한 절망과 많은 시들이 있었고, 예언과 사랑이 있었다. 아버지로서, 하나의 생물체로서 나는, 우리는 무엇인가, 무엇일 수 있는가 끊임없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로드의 잿빛과 맞물려 그런가, 갈수록 찬 바람은 어찌 이리 서글프기만 한지 모르겠다. 돌돌돌돌 구르는 죽은 잎들의 소리. 그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더 스산한 일인지. 다시 책을 펼치며 손에 집히는 대로 그 세계의 편린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그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잊고 잊어버리고 싶은 건 기억하지.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무릎에 올려놓고 있다. 여름 드레스의 얇은 천 너머로 스타킹 끝 부분이 느껴진다. 이 장면을 고정시켜라. 이제 어둠과 추위를 내려달라고 해라. 저주를 받아라.

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例)가 사라지면 그와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사라져버린다. 당신 주위를 돌아보라.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남자는 소년이 불을 지피는 것을 지켜보았다. 신의 불을 뿜는 용. 불꽃들이 위로 솟구쳐올라 별이 없는 어둠 속에서 죽었다. 죽기 전에 한 말이라고 모두 진실은 아니야. 이 행복은 그 터전이 사라졌다 해도 변함없이 진짜야.

리볼버에는 총알이 한 알만 남았다. 네가 진실과 직면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저 사람들이 널 발견하면 그래야 돼. 알았지? 쉬. 울면 안 돼. 내 말 들려? 어떻게 하는지 알지. 그걸 입 안에 넣고 위를 겨냥해. 빨리 세게 해야 돼. 알았지? 울지 말라니까. 알아들었지?

지금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들이 이 피난처를 찾아내지 못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늘 어서 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위험하게도 이 횡재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에도 했던 말을 했다. 행운이란 이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 남자는 거의 매일 밤 어둠 속에 누워 죽은 자들을 부러워했다.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는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되었으며, 그들은 콧노래로 신비를 흥얼거렸다.

이 겨울도

from text 2008/11/10 16:52
실로 얼마 만에 사보는 음반인가. MP3 플레이어를 사고 나서는 생각날 때마다 파일들만 찾아 헤맸는데, 간단히 파일 변환하는 방법도 알았고, 우선 눈에 띈 율리시즈의 시선 OST를 작곡한 Eleni Karaindrou의 Elegy of the Uprooting과 Music For Films를 샀다. 덩달아 산 책은 오정희의 돼지꿈, 톨스토이의 부활,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가을을 지나며 책도 음악도(그렇지, 필름도) 한가득 쌓았으니 천천히 즐길 일만 남았다. 좀 덜 두리번거리고(그래야 덜 지르고 덜 질릴 일이다) 내 안으로 발밑으로 향할 땐가 한다. 술 마시기 좋은 계절, 이 겨울도, 그저 비껴가긴 다 틀린 게다.

블로그 개설 이후 지금까지 쓰던 deadlink님의 coldgray 스킨을 seevaa님의 결벽증 스킨으로 바꿨다. 태터툴즈 1.0.6.1에서 텍스트큐브 1.7.6으로 갈아타면서. 문득 시스템에 대한 불안감도 있고 하여 휴일을 맞아 아침부터 손을 대 본 것인데, 결과적으로 밤 늦게까지 하루를 온전히 여기에다 바칠 수밖에 없었다. 정작 갈아타는 건 대수롭잖았으나, 마음에 드는 새로운 스킨을 찾고, 전에 쓰던 플러그인(특히 zippy님의 새 글 표시 아이콘과 문제(!)의 J.Parker님의 썸네일 리스트 출력 플러그인)을 새롭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다 보낸 것이다. 새 글 표시 아이콘은 구현하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만지는 동안 어찌된 일인지 사진이 들어간 거의 모든 포스트의 사진들이 두세 장씩 없어져버린 것이다. 식음을 전폐하고 종일 삽질 끝에 어쨌든 대충 복구는 된 것 같다(전에는 요령껏 그나마 마음에 드는 사진을 리스트 이미지로 내세웠던 것과 달리 몽땅 첫 번째 사진으로 고정되어 버렸지만). 이 스킨도 옛 버전이지만, 종일 고생한 게 억울해서라도 새 버전에 맞는 획기적인 스킨을 만나기까지는 이대로 밀어볼까 한다. 특별히 고마운 분들이라 이렇게라도 이름자와 링크를 남겨둔다.

사이드바 랜덤 이미지 출력(아무리 해도 못하겠다), 그리고 대문 사진과 문패가 없어졌다. 대문 사진이야 아쉬울 리 없을 테고, 개설 이후 한 번 바뀐 문패글은 남겨 둔다. '하나의 잣대를 지향하며..' 그리고 '저 세상에 가면 잊을 수 있을까..'

근황

from text 2008/10/29 22:30
가슴에 이리 뜨거운 걸 안고 나는 못 살겠다. 너는 괜찮으냐. 빨갛게 떨어지던 나뭇잎이 문득, 묻더라. 다시, 가을이다. 시월도 다 가고, 봄 생각으로 가득할 날도 머지않았다. 그새.

지금 M6에 들어있는 코닥 포트라160vc 한 롤 빼고는 필름도 다 떨어졌고 가격도 오를 추세라 잘 찍진 않지만 필름 몇 롤 사 냉장고에 쟁여 놓았다. 비교적 싼 필름들로, 써본 것 중 대체로 마음에 든 코닥 프로이미지100 6롤, 처음 사보는 코닥 컬러플러스200 10롤, 미쯔비시 수퍼mx100 10롤.

인터넷 주문으로 산 책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로드, 밤은 노래한다, 소설의 고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울 나라의 앨리스, 일본현대 대표시선, 체호프 단편선, 친절한 복희씨, 혀. 대부분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블로그를 보다 마음 동한 책들. 그리고 서연이를 위한 노란 양동이, 삼신 할머니와 아이들, 선생님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아, 화요일의 두꺼비.

산 지 얼마 안 된 MP3 플레이어 YP-U4를 주변에 중고로 넘기고 YP-Q1을 주문하였다. 녀석 작고 예쁜 줄 알았더니 작기만 하고 밉상이었다. 긴 충전 시간에 터무니없이 짧은 재생시간을 가진 데다 신곡 볼 줄 모르고 그저 마음에 드는 음악 왕창 넣어놓고 듣는 나에게 컴퓨터로만 충전하는 방식은 (처음엔 장점이라 생각하였지만)어지간히 불편한 것이었다.

아파트로 가려던 계획은 지금 사는 집 계약기간 만료 후로 미루었다. 눈여겨 둔 아파트를 가계약하고 며칠 후 정식 계약서에 날인까지 하고는 주인 쪽 사정으로 취소하였는데, 여러모로 정나미가 떨어져버렸다. 이래저래 무리인 줄 알면서 밀어본 것, 가계약 후 며칠 이리저리 꾸며본 살림이 아깝지만, 어쨌든 홀가분하고 가볍다.

허리와 왼쪽 어금니가 아파 한동안 애를 먹었다. 덕분에 벼르던 산에도 가지 못하고 위 용량도 좀 줄었다. 자가 진단으로는 이게 다 술 때문이지, 한다. 천천히 즐기는 법에 대한 생각은 많은데 때맞춰 치닫는 이놈의 성질은 어찌 이리 숙지지 않을꼬.

MP3

from text 2008/09/28 23:28
일요일 아침, 쌀쌀한 날씨에 뒤늦게 보일러 불을 지피고는 거실 바닥에 혼자 등 기대고 누워 MP3를 들었다. 꽃다지의 '민들레처럼'에서, 쓴물처럼 사랑처럼 넘어오는 걸 울컥하고 삼켰다. 귀에 꽂고 음악을 들을 때면, 이도 적응이 되려나, 감정선이 말할 수 없이 예민해져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 고등학교 때 동아리 여름 수련회엘 가서 텐트에 누워 친구가 건네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로 들국화를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세상과 단절되어 혼자 어떤 비릿한 슬픔 같은 걸 느꼈던 기억, 마구 쿵쾅거리던 가슴을 잊을 수 없다. MP3 플레이어 장만을 망설였을 때에는 장사익의 뽕짝 절창을 듣고 참을 수 없어 술을 이었던 기억도 한몫 했었다. 먹고 싶은, 먹을 수밖에 없는 얼마나 많은 핑계거리들이 생길 것인가. 어제 아침엔 새로 잠을 청하며 김윤아의 앨범 '유리가면'을 듣다 바닥 아래로 꺼져들고 말았다. 차츰 가슴이 뻑뻑하게 조여 오더니 뻐개지듯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차오르는 눈물을 거둘 뿐, 뼛조각이 해체된 듯 꼼짝 못하고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잠이 들어 오래 헤맸다. 오늘 낮잠에서 깼을 때도 그랬지만, 일어났을 때에는, 한세상 보내버린 듯 먹먹하면서도 지금 바깥에 내리는 가을비처럼 어딘지 맑고 살뜰한 마음이 돌았다.

* 언제 한번, 비 오는 날 차안에서 음악을 들을 때,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다.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무딘 귀를 잠시 틔워주기도 하나 싶다.

* 월요일 퇴근길, 용기(?)를 내어 귀에다 이어폰을 꽂고는 MP3를 들으며 걸었다. 단절의 느낌은 아니군, 몰입도 잘 안 되는데? 풍경을 보는 맛이 섬세한 것도 같고, 길을 건널 때, 그리고 아는 사람을 만날까, 아직까진(!) 자주 두리번거리게 되는구나, 서연이 녀석 다니는 피아노 학원이 이리 가까웠나, 했다.

넣어놓고 두고두고 들을 음악을 고르다가는(기기 등록 이벤트로 마음껏 받아 일정 기간 동안 들을 수 있는 무료 서비스를 받았는데, 들어보고 좋으면 간직하려고 한달 백오십 곡을 구천구백원에 받을 수 있는 상품을 구매하였다) '추억 여행'을 하는 기분에 빠졌다.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어떤 장면, 어떤 공간이 얽힌 것들에 우선 손이 갔다. 양희은의 '가난한 마음'과 '내 님의 사랑은'을 찾아 들을 땐 아, 하고 금세 스무 살 시절로 날아가기도 했다. 좋은 길동무가 생겼다. 간밤엔 세상이 한번 뒤채는 걸 느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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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깊숙이

from text 2008/09/27 01:20
이제야 가을이 왔나 했더니 겨울이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준탱은 가고 술자리 후유증과 아쉬움만 남았다. 예정된 한두 자리만 지나면 확실히 좀 줄여야겠다. 잠시 끊는 것도 좋고.

난생 처음 MP3 플레이어를 샀다. 작고 예쁜 모양에 끌린, 삼성에서 새로 나온 YP-U4. 버스나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만 봐도 그것보단 그 공기와 주변을 관찰하고 즐기는 게 낫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길을 걸을 때 음악을 들으며 세상과 자신을 차단하고 고립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면서도 며칠 뭔가 지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다 저지르고 만 것이다. 누구는 그러더라. 같은 풍경이 듣는 또는 들은 음악에 따라 달리 보인다고. 음악이 아니라도 어찌 같을 수야 있으랴, 하면서도 자동차처럼 그게 또 그렇구나 했다.

큰 건 하나 지를 예정인 건, 아파트다. 역시 세내는 것이지만 지금보다 많이 비싼데다 넓이도 많이 준다. 봐둔 아파트, 봐둔 평수가 결정을 미루는 동안 나가버려 아직 구한 건 아니지만 들어가면 식구들 모두 처음 살아보는 것이다. 지금 사는 곳 계약 기간이 일년여 남았으나 0124님 흔들리는 마음에 넘어가버렸다. 계획대로라면 다음달 말이나 다다음달 초엔 옮길 모양이다(그때쯤 입주 예정인 아파트, 부동산 말로는 다음달 초 입주 점검을 하고 나면 물량이 꽤 나올 거란다). MP3도, 이사도, 결정하고 나니 어딘가 허전하고 복잡하던 마음도 조금은 달래지고 나를 둘러싼 새 환경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품게 된다(음악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는 알 수 없다. 그만큼 기대도 되는 것이지만, 얼마나 가까이 할런지도 모르고. 다만, TV를 없애고 잡다한 짐들도 정리하고 잡생각도 좀 떨치고 무엇보다 깔끔하고 정리된 공간에 대한 기대는 하게 된다). 그러나 체제 깊숙이 편입하는 이 씁쓸한 기분이란. 언제든 탁 놓아버릴 수 있는 몸과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건데, 어딘가 저당 잡히고 목매다는 이 꼼짝없는 마음이란.

내가 너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은 더는 너에게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꽃은 지고 마는 것, 더는 거꾸로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곳에 포개져, 먼 훗날, 깊이 잠들 수 있기를.

* 서연이가 바둑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었다. 유치원 종일반은 관두고 하원에 맞춰 동성초등학교(내가 입학했던 초등학교이다) 근처의 바둑 학원으로 갔다가 피아노 학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가족들이랑 부대끼고 자연을 호흡하며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안쓰럽다. 좋아하니 시킨다는 핑계로 어른들 욕심만 차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 전, 이 녀석이 제 엄마와 함께 프뢰벨영재창의성센터라는 데서 한국웩슬러유아지능검사라는 걸 하고 왔다. 아마도 좌뇌, 우뇌와 관계있을 성 싶은 언어성 소검사(상식, 이해, 산수, 어휘, 공통성)와 동작성 소검사(모양 맞추기, 도형, 토막 짜기, 미로, 빠진 곳 찾기)로 이루어진 건데, 각각의 점수로 언어성 지능과 동작성 지능을 산출하고 합으로 전체 지능을 산출한다고 한다. 결과를 보니 언어성 지능은 상위 0.4%, 동작성 지능은 21.2%, 전체 지능지수는 2%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언어성이 워낙 높아 비교적 평균치에 가까운 동작성을 합하여도 2% 이내에 든다는 것인데, 편차가 커 검사자의 우려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는 제 엄마가 바둑 학원엘 보낸 것인데, 잘 나가는 쪽 밀어주잔 건지 균형을 잡아보잔 건지 모르겠다. 벌써부터 바둑 용어를 구사하며 곧잘 덤비는데, 맨 처음 선생님께 들었다는 '이겼다고 좋아하지 말고 졌다고 속상해 하지 마라'는 거라도 잘 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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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서

from text 2008/09/10 14:42
아니 누(gnu) 한마리가 공포에 질려 도망치다가도 맹수의 배 밑에 깔리고 나서는 먼산을 보듯 순박하고 담담한 눈망울을 가지게 되는 것은 왜일까. 텔레비전에서 본 다큐멘터리 화면이라 해도,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그렇다고 마지막까지 격렬히 몸부림치는 게 아닌, 그 어떤 한없는 순종이 나는 감동적이었다.

김곰치의 '발바닥, 내 발바닥'에서. 그 눈망울을 본 것 같지 않은가.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지 않는가. 그 눈망울이 빤히 바라다보는 것 같지 않은가. 한참 무연히 그 눈망울을 마주보다 '한번 가보는 것이다'에 가슴 일렁였던 원규형의 시 '먼 길'이 떠올랐다. '득병유시 치병유시'에 달아두려다 새로 올린다.

돌담 위의 굴뚝새야
앞 도랑의 버들치야

강 건너
산 넘어 간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마라

그곳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한번 가보는 것이다

저승길이 대문 밖이니
인연이 다했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마라

먼저 가서
기다리는 사람들
저 세상에
더 많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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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병유시 치병유시

from text 2008/09/08 23:41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로항장곡)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있고,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는 백 번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조선 중기의 학자 신흠(申欽)의 채록 민담집 '야언(野言)'에 실려 있다 한다. 처음 매화만 알고 좋아했다 오동을 알고 같이 좋아했더니, 오늘 문득 떠올라 찾아보다 나머지 두 구절을 만났다. 피천득의 수필 '용돈'과 '순례'에 위 두 구절이 나오고, 김구 말년의 휘호에 아래 두 구절이 나온다는 것도. 그러다 만난 또 한 구절.

得病有時 治病有時(득병유시 치병유시) 병을 얻을 때가 있고, 병을 다스릴 때가 있다.

아하, 하고 출처를 뒤지다가 누구는 여기서 得詩有時 解詩有時(득시유시 해시유시)를 끌어내고, 누구는 得道有時 治道有時(득도유시 치도유시)를 끌어내는 걸 보았는데, 글쎄 다 그럴 듯해 보인다. 하긴 뭐든 다 때가 있는 법인지라.

* 오늘 도착한 '지리산 편지'를 후딱 다 읽고 말았다. 좀체 한 권만 붙들고 쭉 읽질 않는데, '빛'도 그렇고, 둘 다 편지(?)라 그런가, 했다. 다음은 박규리의 시 '치자꽃 설화'. 이미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는데, 여기서 처음 보았다. 두 행 말고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혼자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그리고 본문 중 한 대목.

그리하여 걷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한 시간에 겨우 십 리를 가는 길이 얼마나 눈부신 속도의 길이며, 한 시간에 차마 다 보지 못하고 가는 이 길이 얼마나 안타까운 사랑의 길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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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from text 2008/09/05 12:44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의 시 '가재미' 전문. 시간을 두고 몇 번을 읽어도 '파랑 같은'에서는 울컥, 하고 만다. 별일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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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from text 2008/09/05 11:40
생물체들은 서로 다르다. 새로이 번식된 생물체들은 그것들을 낳아준 모체들과 다르며, 새로 태어난 생물체들은 그것들대로 서로 다르다.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 다르다. 어떤 존재가 태어나, 사건들을 겪다가 죽는다면, 출생, 사망을 포함한 그의 사건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사건들에 직접 관계하는 사람은 본인뿐이다. 그는 혼자 태어나며, 혼자 죽을 수밖에 없다. 어떤 한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으며, 거기에는 단절이 있다.

사랑에 빠진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소유하지 못할 경우 상대방을 죽일 생각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이고 싶은 것이다. 또 다른 어떤 경우에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이렇게 미친 듯한 열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얼핏 본 연속감에 기인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 세상에 인간적 한계를 무너뜨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직 연인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육체적 결합과 심정적 결합을 이루면 불연속적인 그들이 완전한 융합에 이르고, 그러면 그들이 연속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죽음을 방탕의 개념에 결부시키는 방법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

시는 상이한 에로티즘의 형태가 마침내 이르는 곳, 즉 상이한 사물들이 뒤섞이는, 불명료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하여 시는 우리를 영원성에 이르게 하고, 시는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연속성에 도달케 한다. 시는 영원이다.

죠르쥬 바따이유의 <에로티즘> 서문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에로티즘' 중에서. 예전에 <註釋, EROTISM>이라는 제목으로, 서문 중에서 고른 어떤 대목 하나 다음에 짧은 이야기, 다른 대목 하나 다음에 연이은 이야기, 또 다른 대목과 이어지는 이야기, 식으로 소설 쓰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쓸만한 대목들만 골라놓고 이야긴 도입부만 겨우 끼적이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발상은 괜찮았고, 돌아보면 그리운 시절이었다. 물론 당시엔 딱 죽거나 죽이고 싶었을 뿐인, 그런 때이지만.

* 잘 짜여진 다시 읽어도 좋을 괜찮은 단편이나 중편소설 하나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수필 서너 편, 울림 있는 시 몇 편 같이 엮어서 책 한 권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래 그런 거지 하며 웃으며 서럽잖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