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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맨발 2006/06/14
  7. 처음 2006/06/14

추천할 만한 것?!

from text 2006/06/20 18:59
2001년 7월 13일, 머꼬의 부탁으로 ‘추천할 만한 한 두서너대여닐고여덟 가지 것들'이란 제목으로 계명대 영화패 "햇살"에 올린 글.


오늘은 종일 비가 내렸다. 저녁에도 비가 오면 꼭 쏘주 한 잔 해야지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은 그쳤다. 그래도 아마 먹을 것 같다. 이 글이 잘 써지면 그 핑계로다가, 잘 안 써지면 뭐 또 그 핑계로다가. 장마비가 휴일까지 계속 오락가락한다는데, 덩달아 나도 오락가락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간밤에는 피곤한 가운데에도 잠을 청하지 못해 새벽 세시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예전에 할매에게 들려주었던 바쳐야 한다에서 시작하여 동지가며 타는 목마름으로를 나직이 열창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다 울 뻔 하였으며, 천년여왕, 은하철도 구구구를 거쳐, 찔레꽃 삼절이 기억나지 않아 헤매다 잠이 들었다. 할매 말로는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들으면, 사람은 엄마 뱃속에서처럼 편안하여 잠잠조용해지다가 시간이 지나면 혼자라는 외로움이 강해져 우울지경에 빠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단다.

가사가 멋져 여기 잠시, 모르는 분들이 많을 듯 하여, 바쳐야 한다 일이절 가사를 일부 옮긴다.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
술마시고 싶을 때 한 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보아라

구차한 목숨으론 사랑을 못해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아라
두려움에 떨면은 술도 못 마셔
그렇게 마신 술에 내가 죽는다

언제 술 마시고 기회 되면 함 불러주겠다.
아, 그리고 저 찔레꽃은 붉게 피이이는 그 찔레꽃 아니고,

엄마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에, 장사익의 절창을 들으며 쓰고 있는데 가사 기억해 쓰기가 어렵다. 봄비!!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허물어지면? 질 때?

에서 도통 기억이 안 난 그 찔레꽃이다. 일이절은 예부터 전해 내려 왔고 삼절은 후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구체적 질감에서 확연히 차이를 보인다고 누가 써놓은 걸 본 적이 있다.

어째 쓰다보니 영 옆길로 샌 감이 있는데, 아, 방금 이상은으로 바꿨다. 한결 쓰기는 낫군.


추천할 만한 것이라, 글쎄 무엇이 있을까, 짧은 생이지만 인생을 살 찌우는데는 단연 이 세 가지가 아닌가 한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과 깊은, 죽음 같은, 연애, 그리고 책이다. 머꼬는 내가 책을 많이 보는 줄 알고 그 쪽으로 유돌 하는 것 같았는데 글쎄 어쨌든 이 세 가지가 인간을 키우는 데는 그만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스승으로 모시지는 못하더라도 본을 받을만한 분이 얼마나 있을 것이며, 그를 만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사실 우리가 스승을 찾는 눈을 갖기도 지난한 일이 아니겠는가.

까지 쓰고 잠시 어머니 전활 받고 어른 계시는 댁에 우유랑 물이랑 가지러 갔다 오고, 할매 와서 같이 저녁 먹고 부치지 않은 편지 들으며 다시 시이자악!!

어쩌면 그래서 책이 그 한 자리를 차지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해당될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외하고, 살아있으며 내가 만난 인생에 스승이 될만한 분을 꼽는다면, 새로 학교를 다니며 다시 만난 단 한 분을 이야기할 수 있다. 재학생 여러분들은 꼭 한 번 그 분의 수업을 듣기를 권해 마지않는다. 사학과 이윤갑 선생님이신데, 나는 그 분에게서 인생에 지침이 될 만한 가치 체계와 산다는 것의 적극적인 의미를 배웠고, 그리고 아름다운 한 영혼을 만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 때는 내가 결혼을 한다면 꼭 저 분을 주례로 모셔야지 생각했었는데, 졸업 후 한 번도 뵙지 못했다. 팔십 팔년인가 구년에 국사 수업을 듣고, 구십 칠팔년에 한국현대사와 한국사회경제사를 들었다. 국사 수업이야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지만 현대사와 사회경제사의 주옥같은 강의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여담인데, 다 에이뿔을 받았다. 계절학기 두 학기까지 십사학기 중 에이뿔은 그게 거의 전부이다.


살아가다 보면 한 고비를 훌쩍 뛰어넘은 듯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어느새 커버린 키를 새삼 보게 될 때도 그렇고 쏘주 두 병을 먹고도 끄덕 없을 때도 그럴 수 있다. 웬만한 일에 눈 하나 깜짝 않고 담담히 받아들일 때가 있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려 다시 도를 닦아야 할 때가 많지만, 반복하다보면 또 훌쩍 한 단계 뛰어넘은 자신을 보게 되곤 하는 것이다. 이성 앞에서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다가 각고의 고민과 노력 끝에 여러 이성 가운데에서 한 두어서너 사람 남기고 어떻게 반인륜적이지 않게 정리할까 고민하게 되는 수가 사람에게는 있는 것이다. 수많은 경험과 무수한 술병들과 새우깡 봉지들, 불면으로 터져버린 실핏줄들이 모두 한 몫 하였겠지만 나는 그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찌인한 연애라고 생각한다. 산다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그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들의 총체일진대,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그것만큼 확실하고 깊은 것이 없다. 오래고 깊은 연애에서 실패, 결혼으로 골인한다거나 죽을 때까지 연애를 지속하지 못하는 것을 일단 실패라 한다면, 그렇다, 실패한다면 나는 거의 무한정 성장하는 것이다. 웬만한 선악과 미추에 흔들리지 않고 한 잔 술에 취하고 한 동이 술에 견뎌내는 것이다. 인생의 이면을 보고 인생의 또 다른 무엇의 존재를 알고 인생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주 만물이 인간과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이것은, 그 긴 터널을 통과하여, 무사히,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죽어갔던가. 세차게 비 오는 날 술 마이 묵고 하늘 함 경건히 올려다보시라. 그렇게 죽어간 많은 별들이 얼마나 초롱이 빛나며 하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나는 지금도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상처를 입으며 생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른 척 한다.


힘든 시절 나를 견디게 해 준 책들이 있다. 언젠가 어느 구석에 그 책들과 준탱이와 부천 노땅이 아니었음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 책들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와 박인홍의 벽 앞의 어둠,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윤후명의 몇몇 소설들과 오정희의 대부분의 소설들이다. 그 때를 돌아보면 간간이 나를 지탱케 하던 시집들과 평론집들도 떠오르지만 단연 위의 소설들이 나와 함께 하였다. 반복되는 주사와 끊임없는 술자리를 묵묵히 지켜주던 두 사람은 내 말벗이며 술벗이요 이즈음도 절실한 그 무엇이다.

내가 읽은 많지 않은 책들 중 단 한 권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죽음의 한 연구를 든다. 일천 구백 칠십 오년에 발표되었으며, 팔십 육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다시 발간하였다. 지금은 같은 출판사에서 상하권으로 나뉘어 새로운 판으로 나와 있다. 한 수도승의 사십일 간의 기록인데 나는 근 일년에 걸쳐 이 책을 읽었다. 매일매일 한 페이지든 한 문단이든, 때로는 며칠간의 기록을 읽어 나갔다. 읽을 때마다 앞부분을 다시 조금씩 읽으며 그 책에 나는 젖어들었다. 처음 조금 읽기 어려워도 꾸준히 조금씩 읽다보면 그 문체의 감칠맛에 빠지고 그 세계의 매력에 흠뻑 젖게 된다. 하루에 하루치의 기록씩 사십일을 투자하여 읽기를 권해 마지않는다. 욕심도 내지 말고 너무 더디 읽지도 말고 하루에 하루치의 분량만, 방학을 이용하여 까짓 이 한 권 함 읽어들 보시라. 사십일 동안 그저 함 다 읽고 한 일주일 쉬었다가 다시 함 읽으시라. 며칠 안 걸릴 것이며 처음 읽을 때와 완연히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정독을 하였는데 그 때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져 나는 새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대 유리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지.
먼지처럼 가볍게 만나
부서지는 햇살처럼 살자던 그대의 소식 다시 오지 않고
유리에 가면 그대 만날 수 있을까,
봄이 오는 창가에 앉아 오늘은
대나무 쪼개어 그대 만나는 점도 쳐보았지.
유리 기억 닿는 곳마다 찔러오던 그 시퍼런 댓바람,
피는 피하자고 그대는
유리로 떠나고
들풀에 허리 묶고 우리 그때 바람에 흔들리며 울었었지.
배고픈 우리 아이들
바닷가로 몰려가 모래성 쌓고
빛나는 태양 끌어 묻어 다독다독 배불렸었고.
그대, 지금도 유리에 가면 그대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아프지 않고 절망하지도 않아
물마른 강가에 앉아 있다던 그대와
맑은 물이 되어 만날 수도 있을 텐데.
어쩌면 그대는 유리를 떠나고
유리엔 우리가 살아서
오늘은 그대가 우리를 만나러 오는
시퍼런 강이 되기도 하겠지만.

철학과 선배이기도 한 노태맹의 유리에 가면이란 시인데 이 유리가 그 수도승이 수도를 하는 동네 이름이다. 이 시는 일천 구백 구십 오년에 세계사에서 유리에 가서 불탄다 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시집에 실려 있다.

박상륭의 다른 책들은 그렇게 추천하고 싶지 않다. 속편격인 길기도 긴 칠조어론이 있는데 정히 궁금하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게 나을 것이고, 소설집으로 열명길과 아겔다마가 있는데 이는 함 읽어볼 만은 하다. 역시 문지에서 나왔다. 근래에 나온 그의 책들은 대충 서점에서 뒤적이다 그냥 나왔다. 점점 형이상학으로 치닫는 그의 세계가 나는 싫다. 어렵다.

나도 새끼 갖고, 그리고 엉덩이 큰 계집의 볼기짝을 두들기며, 그렇게 살고만 싶은 것이다. 계집과 자며, 홍수처럼 사내를 쏟고, 그리고 이튿날은 보습에 묻은 녹이나 쓸어내고 싶고,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그 모든 풍족치 못한 농부들 모양, 굴비 한 마리 지겟가지에 매달고 싶을 뿐이다. 가난에 거칠어져 가시뭉터기 같은 마누라의 손바닥으로 등을 긁히고 싶은 것이고, 홍역에 죽어가는 자식놈 탓에 인색한 의원 무릎 위에 눈물도 흘리고 싶은 것이다. 목소리가 변해 가며, 마을처자들 댕기나 나꿔채다 돌아와 늦잠을 자는 아들놈이 꾀병을 앓아대는 꼴은 얼마나 흐뭇한 것이냐. 그래 그런 것은 얼마나 선하며, 좋은 것이냐. 그 아들이 마포 상복 자락에다 눈물과 황토를 담아다 아비의 관을 덮어 주는 그 황토 냄새는 또한 얼마나 좋을 것이냐. 썩을 수 있다는 건, 죽을 수 있다는 건, 흩어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좋은 일이냐.

열명길에 실린 유리장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아아 정말 얼마나 좋을 것이냐. 얼마나 좋은 일이냐.

최근에 읽었거나 읽고 있는, 나를 매혹시키고 있는 책들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박병상의 파우스트의 선택, 김종철 선생의 간디의 물레와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장일순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 격월간 녹색평론 등이다. 다들 같은 맥락의 책들인데 꼭 권하고 싶은 책들이다. 대부분 녹색평론사에서 나왔으며 생태학 관련 책들이다.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하여, 산다는 것에 대하여, 살아가는 방식에 대하여 한층 높은 차원을 체험하게 해 준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에 대하여 이보다 더 명확하고 바른 해답을 나는 아직 모르겠다.

책에서 만난 가장 큰 스승의 한 분이 바로 영남대 영문과 교수이며 녹색평론사를 이끌어가는 김종철 선생이다. 선생의 글들은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가슴을 쿵쾅 내려치는 경구로 가득차 있다. 그 뛰어난 문장 보다 더욱 놀랍고 아름다운 것들이 그의 세계에 가득하다. 삶 또한 그러하다고 듣고 있다.


열두시가 가깝다. 혼자 기다리다 잠든 할매가 아리다. 세탁기에 든 빨래 널고 이제 자리에 들어야겠다. 모두들 아름다운 꿈들 꾸시기를 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으로 그치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곧 현실이 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비는 잠시 그치고 또 한 세월 가고 겨울이 기다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서 가자.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구로자와 아끼라의 꿈, 그 마지막 즈음 나오는 마을 풍경, 그 세계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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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 대나무

from text 2006/06/20 18:39
나는 테러리스트올시다
광합성 작용을 위해
잎새를 넓적하게 포진하는 치밀함도
바위 절벽에 뿌리내리는 소나무의 비장함도
피침형 잎새로 베어 날리는
나는 테러리스트

마디마디 사이에 공기를 볼모로 잡아놓고
그 공기를 구출하러 오는 공기를
잡아먹으며 하늘을 점거해 나아가는
나는 테러리스트

나의 건축술을 비웃지 말게
나는 나로서만 나를 짓지 않는다네
자유롭고 싶은 공기의 욕망과
나를 죽여버리고 싶은 공기의 살의와
포로로 잡힌 공기의 치욕으로
빚어진 아,
공기, 그 만져지지 않는
허무가 나의 중심 뼈대
나는 결코 나로서만 나를 짓지 않는다네
그래야 비곗살을 버릴 수 있는 법

나는 테러리스트
내 나이를 묻지 말게
뒤돌아 나이테를 헤아리는 그런 감상은
바람처럼 서걱서걱 베어먹은 지 오래
행여 내 죽어 창과 활이 되지 못하고
변절처럼 노래하는 악기가 되어도
한 가슴 후벼파고 마는 피리가 될지니
그래, 이 독한 마음으로
한평생 머리 굽히지 않고 살다가
황갈색 꽃을 머리에 이고
한 족속 일제히 자폭하고야 말
나는 테러리스트


함민복의 시 '대나무' 전문. 이렇게 남의 글 전문을 옮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냘 수도 있겠다만, 뭐 그럴래믄 그러라고 대꾸하기도 하고, 찔리기는 하는군 하고 반성도 하고, 뭐 다 그런 거 아니겠냐며 발을 살짝 들어올려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지.

머꼬네 놀러갔다가 '나는 테러리스트'(란 단어)를 보고.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 심장 속 새집의 열쇠를 빌려드릴께요.

내 몸을 맑은 시냇물 줄기로 휘감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몸 속을 작은 조약돌로 굴러다닐께요.

내 텃밭에 심을 푸른 씨앗이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창가로 기어올라 빨간 깨꽃으로
까꿍! 피어날께요.
엄하지만 다정한 내 아빠가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너그럽고 순한 당신의 엄마가 되드릴께요.

오늘 밤 내게 단 한 번의 깊은 입맞춤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일 아침에 예쁜 아이를 낳아 드릴께요.

그리고 어느 저녁 늦은 햇빛에 실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에,
저무는 산 그림자보다 기인 눈빛으로
잠시만 나를 바래다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뭇별들 사이에 그윽한 눈동자로 누워
밤마다 당신을 지켜봐드릴께요.


최승자의 시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전문. 김수영 이래 이성복, 기형도 등과 함께 최고의 노래를 불러준 사람. 그를 빠뜨릴 순 없을 것 같다.

남해금산

from text 2006/06/17 11:50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라는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히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은 나의 눈이었고, 나의 눈 속에서 당신은 푸른 빛 도는 날개를 곧추세우며 막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요. 그때만큼 지금 내 가슴은 뜨겁지 않아요. 오랜 세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내인가를 뼈저리게 알았고, 당신의 사랑에 값할만큼 미더운 사내가 되고 싶어 몸부림했지요. 그리하여 어느덧 당신은 내게〈사랑하는〉분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왜 내가 자꾸만 당신을 떠나려 하는지를. 사랑의 의무는 사랑의 소실에 다름아니며, 사랑의 습관은 사랑의 모독일테지요. 오, 아름다운 당신, 나날이 나는 잔인한 사랑의 습관 속에서 당신의 푸른 깃털을 도려내고 있었어요.

다시 한 번 당신이 한껏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남으로써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성복의 시집 '남해금산' 뒷표지글. 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놀라운 시들로 가득차 있다. 아니 그 시집 자체가 놀랍다고들 이야기한다. 박남철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시를 쓰기도 했다. '어떤 자식일까 -- 이성복을 발견하고'


나는 오늘 오래간 만에 우표를 사려고 책가게엘 들렀다가 며칠 전에 혼자서 어디 고독이나 좀 씹어보려고 들어갔던 다방에서 송창식이의 '가나다라'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거의 두어 시간 동안 가게 주인의 눈총까지 받아가며(천 오백원이 마침 주머니에 없었기에 남의 시집을 돈 주고 사는 실수는 다행히 저지르지 않았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드는가'ㄴ지 뭔지를 읽어 내려가다가 마침내, 감히, 이따위 엉터리 시집을 낸 놈은 아예 아무도 몰래 없애 버려야만 된다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면서 가슴에 슬쩍 칼처럼 품고 책가게를 나왔었다

젠장, 송창식이 자식이야 뭐 딴따라니까 뭐 내 영업에 그다지 큰 지장을 초래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엉터리 천재 비슷한 자식을 앞으로 더 오래 살려 두었다간, 두고 두고 후회스러울 것은 뻔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from text 2006/06/14 21:09
살펴봤으면 하고 적어놓은 책 목록.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 바바라 런던의 '사진학 강의', 베른하르트의 '옛거장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소멸', 박민규의 '카스테라', 에티엔느 트로크메의 '초기 기독교의 형성',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윤구병의 책, '200주년 성서'...

'사진학 강의'는 SLR클럽 장터에서 구매하였고, 나머지는 좀 더 살펴본 후 구매 결정하여야 할 듯.

잘 읽지도 않으면서 목록이 좀 모이면 사는 버릇은 없어지지 않고 있다. 한두 권씩 살 때는 그렇게 열심히 읽곤 했는데, 인터넷 구매의 단점이기도 하고, 책을 읽기에는 정신이 너무 황폐해져 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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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from text 2006/06/14 17:11
김수영의 '서시'를 옮기고 보니, 최근에 본 시 중 가장 와닿은 문태준의 '맨발'이 생각난다. 최근이래봤자 여섯달도 넘은 것 같지만, 반성하는 의미도 있고 하여.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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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from text 2006/06/14 16:58
처음 시작할래니 떠오르는 글. 김수영의 '서시'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
정리는
전란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
그리고 교훈은 명령은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지지한 노래를
더러운 노래를 생기없는 노래를
아아 하나의 명령을


그리고, 불가의 말씀.

"얻었다 한들 원래 있던 것, 잃었다 한들 원래 없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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