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2건

  1. 세상을 대신하여 2008/06/09
  2. 한평생 꿈결같이 2008/06/03
  3. 아름다운 세상 2008/05/22
  4. 마흔 2008/05/17
  5. 2008/05/15
  6. 사랑 때문에 2008/05/10
  7. 웨딩드레스 2008/04/22
  8.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2008/04/10
  9. 더하고 빼기 2008/04/05
  10. 지리산 2008/03/30
  11. 자유 앞에서 2 2008/03/20
  12. 몸살 2008/02/10
  13. 꽃들에게 2008/01/15
  14. 남자와 여자 5 2008/01/07
  15. 나무의 전언 2008/01/02
  16. 첫눈 2007/12/30

세상을 대신하여

from text 2008/06/09 16:27
생명을 얻어 세상에 나올 때 사람으로 나기 쉽지 않은 일이라고들 합니다. 같은 하늘 아래 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일 테지요. 인연이 있어 만나고 소식을 안다는 것은 그래서 얼마나 가슴 저린 일일는지요. 나고는 가고 오고는 가는 게 세상일이라지만, 잠시 머무는 모양이 이리 안타까운 까닭이기도 하겠지요. 오늘은 지나간 한때처럼 오래오래 당신을 생각합니다.

올해 여름은 사계절을 몇 번이나 겪고도 여태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하는 마음처럼, 사나운 봄도 길어진 걸까요. 지난 밤 꿈에는 헤매는 길목마다 화사한 봄꽃들이 피어 새봄이 온 줄 알았습니다. 전하는 말을 들으면, 나무는 겉으로 드러난 제 키만큼 보이지 않는 사방으로 뿌리를 뻗고 있다고 합니다. 지탱하는 힘이란 이와 같겠지요. 어느 뿌리엔가는 남몰래 꽃도 맺고 열매도 피울 겁니다.

유월, 오늘, 햇살이 곱습니다. 유치원 아이들, 여고생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유난히 정겹습니다. 강물은 바다를 잊지 않는다던가요. 저무는 어느 길목에서 언뜻 아지랑이처럼 번지다 사라지는 미소를 본다면, 그때 가여움인가 하소서. 하기야 먼저 돌아누운들 저도 같이 돌아눕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어쩐지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까무룩, 손만 모으고 맙니다. 나고, 살아 곁에 있는 것, 세상을 대신하여, 이만, 합장.

한평생 꿈결같이

from text 2008/06/03 23:55
옛날 세상 같으면 서러운 심회를 필묵에 맡겨 혼쇄(渾灑)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강저(江渚)에 낚대로 벗을 삼아 한평생 꿈결같이 살아 나갈 수도 있을 터인데, 현대라는 괴물은 나에게 그렇게 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풀이에 따르면, 혼쇄란 발묵(發墨)으로 흐리게 하고 필선(筆線)으로 선명하게 한다는 뜻. 몇 해 전 사다놓고 읽다만, 열화당에서 2000년 새로 펴낸 김용준의 '새 근원수필'을 들추다가,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처음 출판될 당시 발문에서. 다시 읽으며 왜 그렇게들 추켜올리는지 진미를 조금 알 수 있었다.

술병이 과한 겐지, 한 모롱이 돌아가는 겐지, 그저께는 하루 종일 허리가 내려앉듯 아프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한쪽 어깨와 목이 움직이지 못할 만큼 아팠다. 동물은 동물인지라, 마음 아픈 것 만한 게 없다는 건 순 거짓말인 줄 알겠더라. 옆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진통제를 먹어서 그런지 조금 나은 듯하긴 한데, 시커먼 얼굴에 부실한 몸뚱아리를 보고 있자니 다 던져두고 어디 큰 그늘 아래에서 바람이나 쐬고 요양이나 하다 왔으면 딱 좋겠다 싶다. 사는 게, 바쁜데 안 바쁜 건지 안 바쁜데 바쁜 건지 도통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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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

from text 2008/05/22 14:02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명을 내뿜는 나무를 대할 때, 숨쉬는 대지를 만끽할 때,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작고 슬픈지, 물기 차오르는 일인지, 거리에서 식구를 마주쳤을 때, 제 몫을 감당하고 있는, 여물어가는 아이를 볼 때, 내 어깨와 눈빛에 기댄 어린 짐승을 생각할 때, 한 순간, 세상은 얼마나 까마득한지, 돌아서던 자리가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을 때, 다정한 눈빛을 교환할 때, 기어코 다가서는 마음을 묵묵히 억누를 때, 하늘이 감응할 때, 떠나간 사람을 곱게 떠나보낼 때, 살아있는 것이, 죽어가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세상이 얼마나 새파란 거짓말인지, 멀리 멀리 돌아 한 몸뚱이 누일 때, 세상이 얼마나 그리운 것인지, 서럽도록 아름다운 것인지.

마흔

from text 2008/05/17 12:49
뭐든 마음껏 즐길 수 없는 나이, 일부러 무언가에 몰두하는 나이
남아있는 젊음과 열정을 되살려 기어코 소진하고 마는 나이, 어제
과음한 다음 날, 살진 짐승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다
온통 하얗게 바랜 채 내려앉은 겨울 하늘을 만났다.
문득, 세상이 그렇게 작고 예쁘게 보일 수 없었다.
일상에서 잘 지내는 사람들과
여전히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
세상은 여전했다. 제 방식으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 했을 뿐, 정답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석양이 보고 싶다. 운명을 닮은 석양, 며칠 그것만 보다 돌아왔으면 좋겠다.
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오래가는, 사랑을 꿈꿔 왔나 보다.
더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변치 않는, 사랑이 있다고 믿었나 보다.
꾸미고 가꾸는 만큼의 거리와 긴장을 유지한 채
편리와 일상을 버린 채
불가능을 두드렸나 보다.
철이 들면 단순해진다는데, 마지막 남은 한 가닥, 놓질 못하겠다.

from text 2008/05/15 15:11
산을 찾아, 골도 깊은 산을 찾아
죄 없는 꽃을 꺾던 순간
먹물처럼 발끝에서 달아난 검은 그림자
제 모양을 일구는 사이
발밑이 하얗게 무너진 자리에
흑백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던 날, 저무는 산을 찾아
죄 많은 꽃을 꺾던 그 순간
격발된 유황처럼 달아오르던 몸뚱이, 숨길 곳 없어
산을 찾아, 숨을 것 많은 산을 찾아
꽃을 꺾던 순간, 내 멱을 따던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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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

from text 2008/05/10 23:04
사랑 때문에 빌어먹을 사랑 때문에 죽으려, 죽으려 해봤던 사람의 다음 사랑은 치열할까, 단정할까. 바람이 분다. 언제 세상이 한번 다른 세상이었던 적이 있냐고, 다른 세상을 보여 주마던 바람이, 흔들고 흔들리던 그 바람이 묻고 있다. 여전히 이 세상은 그 세상이었고, 그녀는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루이 말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데미지' 마지막 대사. 이게 일종의 반어로 쓰일 수도 있는 줄 몰랐다).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간 사람은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 법, 그러나 어디에도 심장을 내어놓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새,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많은 게 달라졌다. 저무는 마음, 저무는 몸에 한 줄 칼날이 지난다.

* 오월 초부터 삼십도를 웃돌며 제멋대로 날뛰던 더위가 주춤하다. 그저께 밤부터 선선하던 바람이, 가을인 듯, 가슴에 실금 하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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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from text 2008/04/22 11:50
인생은 생방송, 생일, 나의 20년, 청춘 브라보, 기타부기, 사랑해봤으면, 당신은 모르실거야, 웨딩드레스, 여자의 일생,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배신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는 게 뭔지, 타타타, 내 인생은 나의 것, 인생, 산 팔자 물 팔자. 어젯밤 1069회 가요무대에서 '인생이란'을 주제로 들려준 노래들이다. 생일, 나의 20년을 들으며 문득 아득해지더니, 웨딩드레스를 들으면서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한상일이라고 처음 보는 멋진 노신사가 마치 가곡처럼, 또는 읊조리듯 불렀는데, 나에게는 홍민이 부를 때보다 호소력이 훨씬 컸다. 오늘 검색을 통해 한상일, 홍민, 이은미, 임웅균 버전을 만날 수 있었다. 각자의 음색이 잘 살아있어 다 좋았지만, 모두 어제 한상일의 것만큼 좋진 않았다. 그간 홍민이 부르는 것만 보았던지라 원래 홍민의 노래인 줄 알았더니, 이희우 작사, 정풍송 작곡에 한상일의 노래였다. 정인엽 감독의 초기작 '먼데서 온 여자'의 주제가로 불렸다고 한다. 1970년 2월 발표). 그리고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에서 지나간 여러 청춘들이 하나둘 떠오르더니(노래방 문화가 없던 시절, 술자리에서 한 사람씩 날것으로 부르는 노래가 그렇게 좋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사는 게 뭔지, 타타타, 내 인생은 나의 것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소
춤추는 웨딩드레스는 더욱 아름다웠소
우리가 울었던 지난날은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우리가 미워한 지난날도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눈빛 순결이었소
잠자는 웨딩드레스는 레몬 향기였다오
우리를 울렸던 비바람은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우리를 울렸던 눈보라도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눈빛 순결이었소
잠자는 웨딩드레스는 레몬 향기였다오

언젠가 적당히 늙은 어느 날, 이 노래를 멋지게 부를 날이 있을까. 곱게 늙어가서, 한 십여 년 연습하면.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from text 2008/04/10 19:26
최근 만난 글. 신경림의 시 '낙타' 전문과 서준식의 옥중서한 중 1985년 10월 26일자 편지 중에서. 무슨 덧붙일 말이 있겠는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지 않고 포용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면서 그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외롭지 않은 자가 온화하기는 쉽다. 그러나 속절없는 고립 속에서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가득 품고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는 쉽다. 그러나 적개심과 원한 없이 사랑하면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모두'가 아니면 '없음'을, 빛나는 영광이 아니면 파멸을 원했던 나의 오만한 마음은, 이리하여 지금 '없음'과 파멸의 심연을 바로 눈앞에 보며 쓰러져 있다. 악과 부정과 비열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악과 부정과 비열에 대한 증오에 대한 증오까지도 나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고 나의 목소리를 쉬게 했다. 나의 마음을 비틀어 놓았다.

* 이번에도 내가 표를 준 사람은 당선 문턱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아니 아예 의미 있는 수치를 기록하지 못하였다. 면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지역구는 애초 진지하게 기권을 생각하였으나, 나머지 한 표를 조용히 행사하려고 빗길에 아이를 데리고 나선 김에 보탠 것인데, 막상 전체 결과를 대하고 보니, 잘 갈라섰다던 마음이 저도 모르게 갈라서지 않았더라면 하는 데로 향하며 더욱 참담하였다(2.94%라니, 그럴 상태가 아니긴 했지만, 주위에라도 좀 적극적으로 알렸어야 했을 것 아닌가 후회스러웠다. 어쩌면 기대보다 높은 수치였는지 모르지만, 그쪽보다 서울 지역 득표율이 높았다는 걸 애써 위안 삼을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뜻밖의 성과들도 있었지만, 아깝고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았다. 누굴 탓하겠는가.

더하고 빼기

from text 2008/04/05 15:22
어제, 뭘 좀 검색하다 만난 구절, 생텍쥐페리가 했다는 꽤 유명한 말인 모양인데, 여태 몰랐을꼬. 뭔가, 콱, 와 닿았다. 삶이든 관계든 그러할 테지. '완벽함이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

그저껜 연일 술에 술을 더하다 결막하출혈이라고 왼쪽눈 실핏줄이 터졌다. 어제 찾아간 안과 의사 말이, 피로하면 그럴 수 있는데 가만 놔두면 일주일 정도 가고 처방해 주는 안약을 넣으면 한 오일 간단다. 안약을 받으러 간 아래층 약국 약사는 '음식물과는 관계 없지요' 하는 물음에 잠깐 눈을 반짝이더니 '술 마시면 핏기 안 가셔요' 하며 슬쩍 차림을 훑어봤더랬다. 저녁엔 괜히 야구장을 찾아 오연승을 달리던 삼성 라이온즈의 연승을 끊고, 밤 늦게 두산오거리 간바지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놈 핑계로 김치전골, 계란말이에 소주 넉넉하게 먹었다(지리산부터 시작해, 요 며칠, 이 팀, 가창에서 점심 먹고, 저녁엔 강구항에서 대게 먹고, 갈비살 점심에, 툭하면 사우나, 하루 건너 하루 쉬며, 누구 말마따나 여유로움 작렬이다).

지리산

from text 2008/03/30 01:28
1박2일 지리산에 다녀왔다. 금요일 낮에 중산리에 도착하여 마음씨 넉넉한 부부가 운영하는 펜션(물소리 바람소리)에 짐을 풀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이라는 법계사까지 올랐다. 흙길이 거의 없이 돌과 계단 투성인데다 연신 오르막이라 꽤 힘들었다. 겨우내 잘 걷지 않고 근래 마음은 마음대로 지친데다 몸은 몸대로 혹사시켰는지 일찍 다리가 아프고 호흡이 가빠 애를 먹었다. 오는 동안 차창 밖으로 꽤 많이 보이던 진달래는 한 그루도 볼 수 없었다.

오르는 길 내내 경상대 사대부고 1학년 남녀 학생들을 마주쳤는데, 대부분 어찌나 인사성 바르고 활기차고 밝은지 우리 일행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아침에 출발하여 천왕봉까지 오르고 내려온다는 이들은 1년에 한 번 소풍을 이렇게 온다니 인솔하는 선생님들도 그렇게 듬직하고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법계사는 삼층석탑 외엔 근래에 지은 것들이라 볼만한 게 없었다.

내려오자마자 목마른 차에 다섯 명이서 동동주 두 되 맛있게 나눠먹은 게 어설프게 취하는 듯 하더니 펜션 마당에서 삼겹살 구워 소주 열두 병 먹고는 모두들 일찍 취하고 말았다. 모처럼 반주 없이 노래도 한 곡씩들 불렀다. 맑은 날이었는데 어째 별 한 점 볼 수 없었다. 아침에, 남은 삼겹살을 넣어 끓인 김치찌개가 일품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예담참숯굴랜드에 들러 숯가마에서 기분 좋게 땀도 내고, 예쁘게 내리는 비도 맞았다. 대구로 다시 돌아가는 게 이리 싫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산을 오르내리며 땀과 함께 털어버린 어떤 것들이 번잡한 일상이 기다리는 곳으로 악착같이 따라붙고 있었던 것일까, 앞산 어부이씨에서 잡어회와 생아구탕에 곁들이는 반주가 달았다.

자유 앞에서

from text 2008/03/20 16:04
하마터면 계절도 참꽃도 모르고 지나갈 뻔 했지. 아침에 보니 일찍 핀 목련은 떨어지는 것도 있었다. 드문드문 개나리도 피었고 연둣빛 잎새를 단 나무도 눈에 띄었다. 문득 매캐하던 서울 하늘이 떠오른다. 근 한 달여 절반을 서울에서 보냈지만, 맑은 날을 본 기억이 없다. 며칠, 그 하늘처럼, 심란한 와중에 신경이 날카로웠나 보다. 마침 가까이 있다 찔린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우리 시대의 자유는 결국 '경제로부터의 자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가.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여차하면 길을 내면 된다는 거야 역시 술자리 허언에 지나지 않는 걸까. 어느 쪽이든 한 발 내디디면 모양 다른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마치(어쩌면) 당당한 나락이냐, 안온한 나락이냐의 갈림길 같다. 모르거나 막혔을 땐 주저앉아 쉬거나 기다리는 법을 터득해왔건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면)티끌 같은 가벼움에 몸을 맡길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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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from text 2008/02/10 13:14
지독한 목감기를 앓았다. 몸살 기운과 목감기 기운이 조금씩 있더니 차가운 술과 맥주를 마신 다음날부터 끙끙 앓았다. 목에는 다른 사람이 사는 듯 낯선 소리가 나왔고 때때로 그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혼자 동네 의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고 처방전을 받아 나오는데 스물다섯 즈음 은행에 처음 계좌를 개설하였을 때처럼 처음 하는 일인 듯 떨리고 뿌듯한 기분까지 들었더랬다. 일월 말부터였는데 다 나은 듯 하더니 어제 오후부터 몸살 기운이 도지고 목 전체가 퉁퉁 부어 아프다. 설날 저녁 처가 식구들과 많이 마신 술이 뒤늦게 화근인가, 조금 무리하여 피곤한 걸 제때 풀어주지 않고 한 차례 더 무리하면 영락없이 앓는 나이가 된 건가, 속절없이 웃고 만다. 연휴는 길고 마흔으로 가는 통과의례가 독하다.

처고모, 처고모부들과의 설날 술자리에서 오고간 둘째를 낳아야지, 아니 하나에 정성을 다 쏟는 게 낫다는 이야기에서 뻗어간 생각의 가지들은 나를 위해 살 것인가, 자식을 위해 살 것인가, 그게 과연 둘인가를 거쳐 사랑의 속성에 대한 질문에 이르렀다. 사랑이란 무한히 샘솟는 것이어서 배우자든 자식이든 늘어나는 대로 듬뿍듬뿍 나눌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정된 것이어서 이전의 사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소홀해지는 것인가. 타인에게로 확장한다면 그것은 또 어떤 속성을 보여줄 것인가.

모든 걸 거는 사랑이 아름다운 진짜 사랑인가, 적당히 사랑할 줄 아는 게 현명한 진짜 사랑인가. 인생이란 것의 굴곡과 서로 간의 소통불가능성, 시간의 무시무시한 속성에 생각이 이르면 선뜻 한쪽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인생에 정답이 있는가 하는 말은 달리 말하면 인생에 있어서는 모든 게 정답이라는 말과 같다. 해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상반되는 두 가지 진술은 모두 진실이고 진리인 경우가 허다하다. 때때로 인생에서의 결정적인 순간과 무시로 만나는 선택의 순간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머리 속의 지식이나 갈고 닦은 지혜가 아닌 경우가 많다. 몸이 반응하여 먼저 움직이거나 어쩔 수 없는 힘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그 순간까지 자신에게 누적된 모든 것, 말하자면 어린 시절 무지개색 나비를 본 일이나 아무도 몰래 잠시 하늘을 날아올랐던 일, 어느 날 밤 슬쩍 세상 한 자락을 들춰본 일까지 다 포함되어 있겠지만 말이다.

드문드문 내 반쪽이 둥둥 떠다니며 다른 세상을 구경하는 꿈을 꾼다.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이전의 나는 아니지만, 내가 아닌 것은 아니다.

꽃들에게

from text 2008/01/15 19:44
어제, 많이는 아니지만 술을 먹고 들어왔는데 아들 녀석이 열두시가 다 되도록 자지 않고 칭얼대고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길 해 주마 하고는 겨우 옆에 눕힐 수 있었다. 토닥토닥 그 단단한 가슴을 두드리며 이야길 시작하는데, 그때서야 취기가 오르는 듯 나도 잠이 드는 듯 서로가 서로에게 잠겨들었다. 머리 한쪽에서는 어떤 슬프고 이해할 수 없는 정조가 저 혼자 떠다니기도 했다. 어째서 꽃 이야길 하게 되었을까.

봄에 피는 꽃은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단다. 그래서 화사해 보이지. 아지랑이가 막 피어오르는데 그 간지러움을 참을 수가 없었던 거야. 진달래, 개나리, 벚꽃, 목련, 모두. 여름에 피는 꽃은 잎이 무성한 가운데 피니까 더 화려할거야. 장미도 백합도 해바라기도. 우선 꽃이 보여야 하거든. 가을에 피는 꽃? 수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소박한 모양을 하고 있지. 왜 그런지는 몰라. 다들 지는데 피어날려니 그러나? 겨울에 피는 꽃은, 동백이나 매화나, 떨어지면서 더 아프거나 향기만 오래 남는 꽃들이야. 그렇게 흔적을 남기는 거지, 왔다 가는 흔적을.

속씨식물들이 자신의 생식기관을 이렇게 처연하도록 아름답게 피워 올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이제야 어제 집에 들어오자마자 목이 말라 부엌에 들어갔다가 겨울이 오고부터 부엌 가장자리에 들여놓은 여러 화분들 중 납작한 난 화분 하나가 꽃대를 대여섯 개나 밀어올린 걸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 작은 봉오리에서 하얀 꽃이 활짝 필거라고, 대여섯 밤도 지나지 않아 향기가 가득할거라고 아들 녀석에게 일렀던 것도 생각난다. 밤새 꽃들에게 위안이라도 받은 듯, 아침 대기는 잠시 상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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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5

from text 2008/01/07 20:06
물빛에 비친 행성은 아름다워 보였다. 남자가 다른 세상을 사는 동안 여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었다. 작은 행성은 돌기를 멈추었고 세상은 잠시 정지하고야 말았다. 이윽고 누군가 낮게 토하던 한숨을 남자는 들었을까. 지키던 별들은 제집으로 갈 시간을 지켰으며, 물빛 속에 노랗게 빛나던 달은 다시 하얗게 바랬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돌에 새긴 믿음이나 약속도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법, 애초에 바람에 새겼던들, 가볍게 새겼던들. 남자의 잠꼬대 같은 중얼거림에 여자는 눈물 대신 붉은 이를 악물었다. 살아남기 위해 한사코 웅크리던 때가 있었지. 세상을 흘끔거리던 그때, 산처럼 나를 누르던 것은 나였어. 해를 받은 남자의 얼굴이 마지막 남은 황금처럼 빛났지만, 눈이 멀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 작은 행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있으며 할 수 없는 일이란 얼마나 있을까. 마음에 기대 몸서리치는 마음이 갈 자리란 어디에도 없는 것을. 남자는 마른 손을 들어 허공에 놓았다. 딱 죽을 것만 같던 마음도 작은 흔적으로 갈무리된다지요, 산다는 일은 그 흔적을 후벼 파고서라도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겠지요. 앙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처럼 새어나오는 것은 낯익은 여자의 언어가 아니었다. 이제야 오랜 되새김을 마칠 때가 온 것일 뿐, 오랜 되새김이 비로소 시작된 것일 뿐. 죽은 줄 알았던 해바라기들이 행성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였다. 소리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나무의 전언

from text 2008/01/02 18:58
당신이 누구든, 행복하시라, 언제 어디서든. 담배 한 대 태우다가, 언제 거기 있었나, 각자의 거리를 유지하고 칼바람 속에 꿋꿋이 저 혼자 저를 다 감당하고 있는 나무 무리를 보았다. 저 혼자 탄 담배가 필터만 남았을 즈음, 단 한마디 말을 들었다. 버리라 한 것도 같고 벼리라 한 것도 같다. 마음을 이기려 모진 걸 찬 바람에 새기면서도 청춘이라 하였건만, 미혹하는 마음은 멀어도 한참 멀었다 했는데, 사나흘 몰아치던 것들이 정점에서 일순 잦아들었다. 처음 마음이 곱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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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from text 2007/12/30 07:18
새로 공부하듯 술을 마시던 도중 만난 눈, 그 눈팔매에 기어코 말을 하고 말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싸래기처럼 왔다던 것 말고는, 호쾌한 첫눈이었다. 거리를 곰처럼 뒹굴던 사람들이 예뻤다.

* 커다란 백지에 이름 석자 써본다. 이을 말이라곤 없어도 그냥 그렇게 한 귀퉁이에 그 이름 불러본다. 거기도 여기처럼 하늘이 던지는 돌에 멍드는 가슴이 있는가. 그 팔매에 패인 시퍼런 가슴 있는가. (서른여섯 시간 후, 이천칠년 마지막 날, 다시 내린 눈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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