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작곡 2008/07/25
  2. 라이카 2008/07/15
  3. 이야기 둘 2008/07/08
  4. 기도 2 2008/07/01
  5. 마른장마 2008/06/27
  6. 다만 그땐 2008/06/25
  7. 장마 2008/06/18
  8. 세상을 대신하여 2008/06/09
  9. 한평생 꿈결같이 2008/06/03
  10. 아름다운 세상 2008/05/22
  11. 마흔 2008/05/17
  12. 2008/05/15
  13. 사랑 때문에 2008/05/10
  14. 웨딩드레스 2008/04/22
  15.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2008/04/10
  16. 더하고 빼기 2008/04/05

작곡

from text 2008/07/25 14:29
오늘 아침 일이다. 일어나자마자 멜로디언을 꺼내 건반을 두드리는 녀석을 달래가며 밥을 먹이려는데, 언뜻 봐도 복잡한 음표들을 잔뜩 그려놓은 공책을 보며 치고 있는 것이었다. 어딘가 있는 걸 옮겨놓은 거냐, 네가 쓴 거냐 물으니 제가 썼단다. 엊저녁 '일지매' 마지막 회 보느라 정신 팔려있을 때 공책을 펴놓고 뭔가를 열심히 쓰기에 글씨 연습하는 줄 알았더니 이걸 쓰고 있었나 보다. 볼펜으로 오선지를 긋고 음표 아래에 계이름도 군데군데 적어놓은 게 (본 적은 없지만)전문가의 습작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높고 빠른 템포의 곡으로 보였다. 어린 작곡가(?)의 즉흥연주까지 들었으나, 그리 매끄럽지 않은데다 들어도 뭘 잘 모르는 귀를 가진 탓에 별 큰 감흥은 없었다. 유치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어떤 연주가 떠올라 써 본 건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연주해 본 건지 물었더니, 예쁜 음악이 생각나서 쓴 거란다. 아무렴, 창작이 아니라 어디서 들은 걸 어설프게 베껴본 것이라 하더라도 나에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국이 물난리를 겪는 와중에도 홀로 쨍쨍한 폭염주의보를 발하더니 마침 내리는 단비가 반갑다. 녀석의 말 곧이곧대로, 누가 뭐래도 녀석의 첫 작곡인 거다.

* 얼마 전에는 피아노학원에서 집으로 걸어오며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본 일이 있다. 대뜸 '서연이도 몰라요' 하더니, 나중에는 '한마음콜 택시가 좋아도 다른 택시도 타는 거예요' 한다. 그렇지, 뭐든 하나만 그리 좋을 수 있나, 하다가, 택시 사랑이란 저와 같아야 하는가, 소리 내어 한참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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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

from text 2008/07/15 15:48
그는 내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고 쓰다듬고 만지고 작동시킬 수 있다. 여전히 마음대로 부릴 수야 없지만 나를 위해 나름의 충분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와 같이 처음 저도 나를 길들일 때 느꼈을 나의 배려를 잊지 않고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대체로 내가 상대를 좋아할 때는 그도 나를 좋아하기만을 바라지만, 그도 나를 좋아할 때는 그 크기와 성질을 재고, 울고 웃는다. 한 발 먼저 다가가기를 겁내지만 한 발 물러날 때는 냉큼 한 발 다가가고 만다. 우리도 그랬다. 다만 다 가질 수 없다는 분명해 보이는 사실이 더 가지려는 욕망을 적절히 제어해 주었을 뿐이다. 물론 이 독특한 거리는 저와 나를 우리일 수 있게 하지만 언제든 우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게도 한다. 어느 쪽이든 낮은 자리에 맞출 수밖에 없는 처지가 높은 교감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선 자리가 늘 불안한 것이다. 사람들은 직립보행 이후 많은 걸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의심과 질투와 질병을 얻었다. 마주보는 사랑을 하고부터 사랑을 마주볼 수 없게 되었다. 태초처럼 가늘게 반응한 이래 때때로 그와 내가 서로에게 감응하던 반짝이는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그때 저와 나는 저와 나의 도덕으로 충분하였다. 하지만 언제든 손끝을 놓아버리거나 손끝에서 달아나는 꿈을 지속적으로 꾼다는 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낡고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골병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해석에 실눈을 치뜨다 이어지는 길이 이어지는 길이 아님을 알았다. 늘 그랬듯, 이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게나, 앙상한 이름으로만 남지는 않을, 나의 특별한 친구.

이야기 둘

from text 2008/07/08 16:28
오래 전 어디서 본 이야기 하나. 학동들이 모여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난데없이 맹구, 나는 쓸 줄은 아는데 읽을 줄을 몰라. 기가 막힌 학동들, 그럼 한번 써봐. 그러자 맹구, 붓을 들더니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고는 그 한가운데 점을 하나 찍는 것이었다. 의아한 학동들, 그게 뭔데? 맹구 왈, 난 쓸 줄은 아는데 읽을 줄은 몰라.

그렇다. 읽는 건 읽고 싶은 놈들 몫이고, 뜻이야 있든 없든 그런 거야 알든 모르든, 사는 건 사는 놈들 몫인 거다. 커다란 동그라미 한가운데 콱 박히는 삶(이든 뭐든)을 써내려가는 놈 보고, 너 뭐야? 하지 말라는 거다.

역시 어디서 본 이야기 하나 더. 대한민국에 남녀혼탕이 문을 열었다. 남.녀.혼.탕. 대문짝만하게 내건 간판을 보고 남자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런데 탕 안엔 남자들만 우글거릴 뿐,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열 받은 손님들이 주인에게 따졌다. 남녀혼탕이라더니 이게 뭐요? 주인 왈, 여자 손님이 안 오는 걸 나더러 어쩌라는 거요?

그렇다. 그건 주인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안 오는 걸 어쩌란 말이냐. 강태공이 낚던 세월도, 기다린다는 때도, 아니 오면 그 뿐, 누굴 탓한단 말이냐.

* 점심 먹고 시시덕거리다 문득 떠올라 주변에 내놓은 이야기들. 어떤 걸로도 이 무시무시한 더위가 싹 가시기야 하랴마는, 잠시 웃고 잠시 느끼는 가운데, 온몸으로 뚫고 나가든 슬쩍 비껴가든, 한 세상 지나가고 말 테지, 뭐 그런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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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2

from text 2008/07/01 09:50
아아저들은저들이지은죄를알지못하고우리는우리가죄지은줄알지못하나이다이제도저제도저희가저희를용서한줄모르는것처럼우리도우리가새가슴부여안고버팅기는줄영원히모를것을믿사옵나이다해가돋고별이지는것이정하신이치이듯이언젠가는저희도가고다시오지않을것을아옵고저가나를모르는것처럼나도저를알지못할것을아옵나이다어제도오늘도부재중인우리는우리의부재를더는슬퍼하지아니하옵나니바라지않고건네지않아도별이돋고해가지는것과마찬가지로우리를모른척하옵소서이제도저제도나라와권세와영광이저희에게있다일컬어지고있으며저는저가일컫는것이망령된것임을알지못하나이다보시는바들으시는바와같이저가달리구하는것이없으니새가슴이라도부여안고올곧이부재하는저를죄없다하지아니하지마옵소서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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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장마

from text 2008/06/27 00:25
누구나 제 몫이 있다더니, 마감 전에는 알 수 있는 건가. 마른장마 지나는 동안, 나 스스로 나와 세상의 어떤 가능성을 닫은 느낌, 돌이킬 수 없는 한 걸음을 천천히 내딛는 느낌이다. 이미 강제된 느낌. 세상은 그러나 또 그때, 그에 맞는 얼굴을 보여줄 게다. 제 본성대로 썩은 손짓이라도 하고야말 테니. 그때, 어디로 갈지는 역시 그때밖에는 모르는 것이지만. 세상에 축복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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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땐

from text 2008/06/25 14:49
조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겠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겠다. 말하자면 역사가 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아무도 원치 않는다 하여 접시 물에 코를 빠뜨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세상은 그만큼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것이다. 내가 아는 것보다 충분히 악의적인 것이다. 해서 말인데, 술과 안주 앞에 맹세를 놓듯이, 두 손 두 발 놓고, 우리가 세상을 외면하잔 거다. 물론 사태의 결말을 책임질 순 없다. 다만 그땐 손짓이 보일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세상이든 누구든, 저도 돌아앉게 마련이니.

* 별처럼 찾아온 거다. 고운 꽃처럼 다가온 거다. 부여안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안고 가지 않을 수 없는 거다. 그게 명령이다. 그때 명령의 정체다. 손짓마저 외면할 수는 없는 것,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 조금 전, 노태맹의 '푸른 염소를 부르다', 권여선의 '분홍 리본의 시절',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슬라보예 지젝의 '지젝이 만난 레닌'이 왔다.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를 보고 마음 동해 주문한 책들. 거기 여러 잠언들이 있었지만, 하나만. 고통은 무례를 용서하게 만드는 법이다.

다음은 태맹이형의 시집 뒤에 실린 인상적인 '시인의 산문' 중 한 구절.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 가장 오래, 가장 강렬하게 사랑한 이 것. 조사 하나를 들고 밤새 문장 한 구석에 꿰어 맞추기하던 날들. 입 안에 얼음이 씹힌다. 고맙다, 덕분에 많이 고통스러웠다. 젠장.

그리고 시 한 편. 동백꽃이 지지 않는다.

5월이 다 지나도록
아파트 화단 동백꽃이 지지 않는다.
져야 할 것이 지지 않으니
끔찍하고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건 확실히 강박장애다.

난 중력에 병들어 있는 거다.
동네 돼지 수육집 혼자 막걸리를 마시며
이제 아무에게도 나를 이해시키지도
누구에게도 나를 설명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건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거다.

그러나 革命이
붉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든
동백꽃처럼 그 자리에서 지지 않든
그건 동백이 가고 그 동백을 만나러 오는
봄바람의 몫이다. 모가지를 꺾고
붉게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봄바람의 동백꽃들 몫이다.

막걸리잔에 앞머리 적시며 졸다가
나 문득 한 소식 본다. 사랑이란
그 사랑을 타인으로 놓아주는 것
지지 않는 동백꽃을
그저 붉은 동백꽃으로 바라다보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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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from text 2008/06/18 16:21
허공에 대고서라도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도
떨리는 손, 시커먼 얼굴을 달래가며 술을 마시는 것도
다리로 다리를 끌며 꾸역꾸역 산을 오르는 것도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것도
추억은 추억일 뿐
거리를 헤매며 못내 지난 기억의 갈피를 뒤지는 것도
날이 밝고서야 잠이 드는 것도
다 저를 위한 것이다 스스로 위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의 맹세만큼 부질없는 것이 있을까
생을 지나다 마주친 그 사람
비슷한 부류일지라도 같은 부류는 아니었다고 되뇐들
빗속에 땀 흘려 애써 고단한 몸을 만든들
낯선 가슴, 먼 얼굴로 내일 일일랑은 내일 만난들
긴 장마에 땅이 하늘로 일어나든, 하늘이 땅으로 내려앉든
각자는 각자일 뿐, 시간의 더께에 손끝 하나 덧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렴, 엄살 부려본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고말고

* 어제, 서연이가 아파 유치원 마치고는 피아노학원도 쉬고 같이 동네 의원에 들렀다 집으로 갔다. 저녁 먹고 잠시 놀다 피곤하여 혼자 먼저 누웠더니 슬그머니 들어와 옆에 누우며 속삭이는 말이 예뻤다. 새로 가슴이 뛰는 듯 벅찼다. 그 청유형의 은근한 억양과 뉘앙스를 전할 수 없어 안타깝다. 아빠, 사랑해. 내일 아침에도 같이 손잡고, 유치원에 가자. 일찍 일어나서 밥 먹고 약 먹고. 아빠, 사랑해. 내일도 같이 유치원에 가자. 아빠도, 잘 자. 그러고는 한번도 보채지 않고 잠이 들었다. 0124님은 월요일 야근에다 오늘부터 또 석 달 가량 수요일과 목요일, 밤늦게까지 교육이다. 긴 하루가 늘었다. 아직 여름은 오지도 않은 듯 하더니 밤새 장마가 시작되었다. 한순간 무너질지라도 쌓을 땐 열심히 쌓을 수밖에 없을 터, 어쨌든 당분간 근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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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대신하여

from text 2008/06/09 16:27
생명을 얻어 세상에 나올 때 사람으로 나기 쉽지 않은 일이라고들 합니다. 같은 하늘 아래 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일 테지요. 인연이 있어 만나고 소식을 안다는 것은 그래서 얼마나 가슴 저린 일일는지요. 나고는 가고 오고는 가는 게 세상일이라지만, 잠시 머무는 모양이 이리 안타까운 까닭이기도 하겠지요. 오늘은 지나간 한때처럼 오래오래 당신을 생각합니다.

올해 여름은 사계절을 몇 번이나 겪고도 여태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하는 마음처럼, 사나운 봄도 길어진 걸까요. 지난 밤 꿈에는 헤매는 길목마다 화사한 봄꽃들이 피어 새봄이 온 줄 알았습니다. 전하는 말을 들으면, 나무는 겉으로 드러난 제 키만큼 보이지 않는 사방으로 뿌리를 뻗고 있다고 합니다. 지탱하는 힘이란 이와 같겠지요. 어느 뿌리엔가는 남몰래 꽃도 맺고 열매도 피울 겁니다.

유월, 오늘, 햇살이 곱습니다. 유치원 아이들, 여고생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유난히 정겹습니다. 강물은 바다를 잊지 않는다던가요. 저무는 어느 길목에서 언뜻 아지랑이처럼 번지다 사라지는 미소를 본다면, 그때 가여움인가 하소서. 하기야 먼저 돌아누운들 저도 같이 돌아눕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어쩐지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까무룩, 손만 모으고 맙니다. 나고, 살아 곁에 있는 것, 세상을 대신하여, 이만, 합장.

한평생 꿈결같이

from text 2008/06/03 23:55
옛날 세상 같으면 서러운 심회를 필묵에 맡겨 혼쇄(渾灑)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강저(江渚)에 낚대로 벗을 삼아 한평생 꿈결같이 살아 나갈 수도 있을 터인데, 현대라는 괴물은 나에게 그렇게 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풀이에 따르면, 혼쇄란 발묵(發墨)으로 흐리게 하고 필선(筆線)으로 선명하게 한다는 뜻. 몇 해 전 사다놓고 읽다만, 열화당에서 2000년 새로 펴낸 김용준의 '새 근원수필'을 들추다가,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처음 출판될 당시 발문에서. 다시 읽으며 왜 그렇게들 추켜올리는지 진미를 조금 알 수 있었다.

술병이 과한 겐지, 한 모롱이 돌아가는 겐지, 그저께는 하루 종일 허리가 내려앉듯 아프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한쪽 어깨와 목이 움직이지 못할 만큼 아팠다. 동물은 동물인지라, 마음 아픈 것 만한 게 없다는 건 순 거짓말인 줄 알겠더라. 옆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진통제를 먹어서 그런지 조금 나은 듯하긴 한데, 시커먼 얼굴에 부실한 몸뚱아리를 보고 있자니 다 던져두고 어디 큰 그늘 아래에서 바람이나 쐬고 요양이나 하다 왔으면 딱 좋겠다 싶다. 사는 게, 바쁜데 안 바쁜 건지 안 바쁜데 바쁜 건지 도통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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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

from text 2008/05/22 14:02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명을 내뿜는 나무를 대할 때, 숨쉬는 대지를 만끽할 때,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작고 슬픈지, 물기 차오르는 일인지, 거리에서 식구를 마주쳤을 때, 제 몫을 감당하고 있는, 여물어가는 아이를 볼 때, 내 어깨와 눈빛에 기댄 어린 짐승을 생각할 때, 한 순간, 세상은 얼마나 까마득한지, 돌아서던 자리가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을 때, 다정한 눈빛을 교환할 때, 기어코 다가서는 마음을 묵묵히 억누를 때, 하늘이 감응할 때, 떠나간 사람을 곱게 떠나보낼 때, 살아있는 것이, 죽어가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세상이 얼마나 새파란 거짓말인지, 멀리 멀리 돌아 한 몸뚱이 누일 때, 세상이 얼마나 그리운 것인지, 서럽도록 아름다운 것인지.

마흔

from text 2008/05/17 12:49
뭐든 마음껏 즐길 수 없는 나이, 일부러 무언가에 몰두하는 나이
남아있는 젊음과 열정을 되살려 기어코 소진하고 마는 나이, 어제
과음한 다음 날, 살진 짐승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다
온통 하얗게 바랜 채 내려앉은 겨울 하늘을 만났다.
문득, 세상이 그렇게 작고 예쁘게 보일 수 없었다.
일상에서 잘 지내는 사람들과
여전히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
세상은 여전했다. 제 방식으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 했을 뿐, 정답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석양이 보고 싶다. 운명을 닮은 석양, 며칠 그것만 보다 돌아왔으면 좋겠다.
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오래가는, 사랑을 꿈꿔 왔나 보다.
더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변치 않는, 사랑이 있다고 믿었나 보다.
꾸미고 가꾸는 만큼의 거리와 긴장을 유지한 채
편리와 일상을 버린 채
불가능을 두드렸나 보다.
철이 들면 단순해진다는데, 마지막 남은 한 가닥, 놓질 못하겠다.

from text 2008/05/15 15:11
산을 찾아, 골도 깊은 산을 찾아
죄 없는 꽃을 꺾던 순간
먹물처럼 발끝에서 달아난 검은 그림자
제 모양을 일구는 사이
발밑이 하얗게 무너진 자리에
흑백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던 날, 저무는 산을 찾아
죄 많은 꽃을 꺾던 그 순간
격발된 유황처럼 달아오르던 몸뚱이, 숨길 곳 없어
산을 찾아, 숨을 것 많은 산을 찾아
꽃을 꺾던 순간, 내 멱을 따던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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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

from text 2008/05/10 23:04
사랑 때문에 빌어먹을 사랑 때문에 죽으려, 죽으려 해봤던 사람의 다음 사랑은 치열할까, 단정할까. 바람이 분다. 언제 세상이 한번 다른 세상이었던 적이 있냐고, 다른 세상을 보여 주마던 바람이, 흔들고 흔들리던 그 바람이 묻고 있다. 여전히 이 세상은 그 세상이었고, 그녀는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루이 말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데미지' 마지막 대사. 이게 일종의 반어로 쓰일 수도 있는 줄 몰랐다).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간 사람은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 법, 그러나 어디에도 심장을 내어놓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새,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많은 게 달라졌다. 저무는 마음, 저무는 몸에 한 줄 칼날이 지난다.

* 오월 초부터 삼십도를 웃돌며 제멋대로 날뛰던 더위가 주춤하다. 그저께 밤부터 선선하던 바람이, 가을인 듯, 가슴에 실금 하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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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from text 2008/04/22 11:50
인생은 생방송, 생일, 나의 20년, 청춘 브라보, 기타부기, 사랑해봤으면, 당신은 모르실거야, 웨딩드레스, 여자의 일생,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배신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는 게 뭔지, 타타타, 내 인생은 나의 것, 인생, 산 팔자 물 팔자. 어젯밤 1069회 가요무대에서 '인생이란'을 주제로 들려준 노래들이다. 생일, 나의 20년을 들으며 문득 아득해지더니, 웨딩드레스를 들으면서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한상일이라고 처음 보는 멋진 노신사가 마치 가곡처럼, 또는 읊조리듯 불렀는데, 나에게는 홍민이 부를 때보다 호소력이 훨씬 컸다. 오늘 검색을 통해 한상일, 홍민, 이은미, 임웅균 버전을 만날 수 있었다. 각자의 음색이 잘 살아있어 다 좋았지만, 모두 어제 한상일의 것만큼 좋진 않았다. 그간 홍민이 부르는 것만 보았던지라 원래 홍민의 노래인 줄 알았더니, 이희우 작사, 정풍송 작곡에 한상일의 노래였다. 정인엽 감독의 초기작 '먼데서 온 여자'의 주제가로 불렸다고 한다. 1970년 2월 발표). 그리고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에서 지나간 여러 청춘들이 하나둘 떠오르더니(노래방 문화가 없던 시절, 술자리에서 한 사람씩 날것으로 부르는 노래가 그렇게 좋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사는 게 뭔지, 타타타, 내 인생은 나의 것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소
춤추는 웨딩드레스는 더욱 아름다웠소
우리가 울었던 지난날은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우리가 미워한 지난날도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눈빛 순결이었소
잠자는 웨딩드레스는 레몬 향기였다오
우리를 울렸던 비바람은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우리를 울렸던 눈보라도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눈빛 순결이었소
잠자는 웨딩드레스는 레몬 향기였다오

언젠가 적당히 늙은 어느 날, 이 노래를 멋지게 부를 날이 있을까. 곱게 늙어가서, 한 십여 년 연습하면.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from text 2008/04/10 19:26
최근 만난 글. 신경림의 시 '낙타' 전문과 서준식의 옥중서한 중 1985년 10월 26일자 편지 중에서. 무슨 덧붙일 말이 있겠는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지 않고 포용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면서 그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외롭지 않은 자가 온화하기는 쉽다. 그러나 속절없는 고립 속에서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가득 품고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는 쉽다. 그러나 적개심과 원한 없이 사랑하면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모두'가 아니면 '없음'을, 빛나는 영광이 아니면 파멸을 원했던 나의 오만한 마음은, 이리하여 지금 '없음'과 파멸의 심연을 바로 눈앞에 보며 쓰러져 있다. 악과 부정과 비열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악과 부정과 비열에 대한 증오에 대한 증오까지도 나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고 나의 목소리를 쉬게 했다. 나의 마음을 비틀어 놓았다.

* 이번에도 내가 표를 준 사람은 당선 문턱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아니 아예 의미 있는 수치를 기록하지 못하였다. 면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지역구는 애초 진지하게 기권을 생각하였으나, 나머지 한 표를 조용히 행사하려고 빗길에 아이를 데리고 나선 김에 보탠 것인데, 막상 전체 결과를 대하고 보니, 잘 갈라섰다던 마음이 저도 모르게 갈라서지 않았더라면 하는 데로 향하며 더욱 참담하였다(2.94%라니, 그럴 상태가 아니긴 했지만, 주위에라도 좀 적극적으로 알렸어야 했을 것 아닌가 후회스러웠다. 어쩌면 기대보다 높은 수치였는지 모르지만, 그쪽보다 서울 지역 득표율이 높았다는 걸 애써 위안 삼을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뜻밖의 성과들도 있었지만, 아깝고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았다. 누굴 탓하겠는가.

더하고 빼기

from text 2008/04/05 15:22
어제, 뭘 좀 검색하다 만난 구절, 생텍쥐페리가 했다는 꽤 유명한 말인 모양인데, 여태 몰랐을꼬. 뭔가, 콱, 와 닿았다. 삶이든 관계든 그러할 테지. '완벽함이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

그저껜 연일 술에 술을 더하다 결막하출혈이라고 왼쪽눈 실핏줄이 터졌다. 어제 찾아간 안과 의사 말이, 피로하면 그럴 수 있는데 가만 놔두면 일주일 정도 가고 처방해 주는 안약을 넣으면 한 오일 간단다. 안약을 받으러 간 아래층 약국 약사는 '음식물과는 관계 없지요' 하는 물음에 잠깐 눈을 반짝이더니 '술 마시면 핏기 안 가셔요' 하며 슬쩍 차림을 훑어봤더랬다. 저녁엔 괜히 야구장을 찾아 오연승을 달리던 삼성 라이온즈의 연승을 끊고, 밤 늦게 두산오거리 간바지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놈 핑계로 김치전골, 계란말이에 소주 넉넉하게 먹었다(지리산부터 시작해, 요 며칠, 이 팀, 가창에서 점심 먹고, 저녁엔 강구항에서 대게 먹고, 갈비살 점심에, 툭하면 사우나, 하루 건너 하루 쉬며, 누구 말마따나 여유로움 작렬이다).